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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작은 심장’을 사랑한 아동인권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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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6 10:28:49

     
야누시 코르차크는 진보적 고아원을 도입했고 어린이 신문을 창간했으며 아이들의 인권을 지키려 애썼다. 1930년대 초반 ‘고아들의 집’ 안뜰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코르차크의 모습.  양철북 제공

야누시 코르차크는 진보적 고아원을 도입했고 어린이 신문을 창간했으며 아이들의 인권을 지키려 애썼다. 1930년대 초반 ‘고아들의 집’ 안뜰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코르차크의 모습. 양철북 제공

 

작가이자 교육자·의사
유대계 폴란드인 코르차크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바꿔야한다는 신념
‘정의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진보적 고아원을 폴란드에 도입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의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는 100만명 가까운 유대인이 학살됐다. 전쟁이 끝날 무렵 나치가 인멸을 시도하면서 수용소 시설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 수용소 터에 만들어진 추모공원에는 폴란드의 여러 채석장에서 가져온 돌 1만7000개가 놓여 있다. 돌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은 사람들이 실려온 마을, 도시, 나라를 상징한다. 1만7000개 돌 중에 사람 이름이 새겨진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 돌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야누시 코르차크(헨리크 골트슈미트) 그리고 아이들.”

유대계 폴란드인 작가이자 교육자, 의사인 야누시 코르차크(Janusz Korczak)는 “유럽에서는 안네 프랑크만큼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안네 프랑크처럼 그도 홀로코스트에 희생되었고, 일기장을 남겼다. 안네 프랑크와 달리 그는 죽음을 피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를 택하지 않았다”.

코르차크는 1878년 또는 1879년 태어났다. 생일이 7월22일인 것은 분명한데, 태어난 해가 언제인지는 코르차크도 잘 알지 못했다. 죽은 날도 약간 불명확하다. 코르차크는 1942년 8월6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그가 보호하던 아이들 192명과 함께 트레블링카 수용소행 ‘가축열차’를 탔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 도착한 희생자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바로 ‘가스실’로 끌려가 죽음을 맞았다.

본명은 헨리크 골트슈미트(Henryk Goldszmit), 야누시 코르차크는 필명이다. <아이들의 왕 야누시 코르차크>는 “성씨가 그 사람의 종교를 드러내는 폴란드에서 골트슈미트는 의심할 여지 없는 유대인의 이름, 곧 이방인의 이름이었다. 야누시 코르차크와 같은 옛 상류층 이름을 씀으로써, 헨리크는 웅대했던 폴란드 역사를 연상시키는 이름의 내부인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코르차크는 “위인의 삶은 전설과 같다. 고되지만 아름답다”고 썼다. 그의 삶이 꼭 그랬다. 원래 직업은 의사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과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그 시작은 ‘다섯 살’ 때였다. 외할머니에게 “추레하고 배고픈 아이들이 없도록, 세상을 바꾸는” 계획을 털어놓았다고 책은 전한다.

2차 세계대전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은 유대인 학살 자행
바르샤바의 고아원 아이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끌고 가

코르차크는 열외시켜주는
독일 장교를 뿌리치며
아이들과 죽음의 열차를 탄다

의사보다는 작가로 더 큰 명성을 얻었다. 작가 코르차크를 집으로 초대하기 위해 아이들이 아프다며 왕진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코르차크는 이런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작가가 아닌 의사를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도 “문학은 말뿐이지만 의학은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어린이병원에서 7년간 일했지만 마음을 잡지 못했다. 열이 나는 아이를 보살펴 고비를 넘기고 병을 낫게 해주어도 의사 손을 떠난 아이가 다시 암흑의 세상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불우한 아이들에게 더 나은 삶을 안겨줄 방법을 찾아야 했다.

1910년 ‘유대 아동 고아원’ 운영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의술을 버리지도 않았다. 교육과 의술을 결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아원을 임상 관찰의 장으로 삼아, 교육 분야에서도 구체적인 증상에 근거한 진단 체계를 만들고 싶었다. “의사가 환자의 열, 기침, 메스꺼움을 대하듯 교사도 학생의 웃음, 눈물, 빨개진 얼굴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갔다. “정의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진보적 고아원들을 폴란드 사회에 도입했고, 최초로 전국 단위 어린이 신문을 창간했으며, 교사들에게 오늘날 도덕교육으로 불리는 교육 방식을 가르쳤고, 소년법원에서 아이들 인권을 보호하려 애썼다.”

1978년 폴란드 트레블링카 수용소 터에 조성된 추모공원에서 열린 ‘야누시 코르차크와 아이들’의 추모석 제막식.  양철북 제공

1978년 폴란드 트레블링카 수용소 터에 조성된 추모공원에서 열린 ‘야누시 코르차크와 아이들’의 추모석 제막식. 양철북 제공

그는 ‘영화처럼’ 죽음을 맞이했다. 1942년 8월6일, 독일군은 예고 없이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 안에 있는 코르차크의 고아원에 이동을 명령했다. 그것이 곧 죽음의 수용소로 가는 길인 것을 코르차크는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두려움에 떨며 저마다 작은 물병, 제일 좋아하는 책, 일기장, 장난감 따위를 꼭 붙들고 줄을 서는 동안, 코르차크는 아이들을 안심시키려 애썼다.” 그리고 아이 192명과 어른 10명은 깃발을 들고 열차가 있는 집하장까지 행진했다. 코르차크가 아이들과 함께 열차를 타기 직전, “몇몇 사람에 따르면, 바로 그 순간 한 독일 장교가 인파를 뚫고 코르차크에게 다가와 쪽지 하나를 건넸다고 한다. (유대 아동 복지 기관) 첸토스의 한 유력 회원이 그날 아침 코르차크를 대신해 게슈타포에 탄원을 넣었고, 그 결과 코르차크는 열외 허락을 받았지만 아이들은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코르차크는 고개를 젓고는 독일 장교에게 가라고 손짓했다고 전해진다”.

코르차크는 아이들을 사랑했다.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려 노력했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쳤다. 바르샤바의 교육대학에서 아동심리학을 가르칠 때는 어린이병원 엑스레이실에서 첫 강의를 하기도 했다. 코르차크는 데리고 온 어린아이를 검사장치 뒤에 세우고는 콩닥콩닥 뛰는 아이의 심장을 스크린으로 보여줬다. “지금 이 영상을 앞으로 절대 잊지 마세요.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기 전에, 어떤 벌이든 내리기 전에, 겁먹은 아이의 심장을 마음속에 떠올리세요.” 코르차크는 다시 아이의 손을 잡고 출입문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코르차크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1924)와 국제연합총회(1959)에서 아동권리선언을 채택하기 훨씬 전부터 그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가 구상한 선언은 호소가 아니라 요구였다. 코르차크가 자신의 저작에서 이야기한 아동의 권리만 정리해도 ‘코르차크의 아동권리선언’이 만들어진다. “아이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어른도 바보가 많은데 아이라고 없겠는가” “아이는 현재에 살 권리가 있다-아이는 미래의 사람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이다” “아이는 자기답게 살 권리가 있다-아이는 당첨 번호가 찍혀 있는 복권이 아니다” “아이는 자신의 슬픔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조약돌 하나를 잃은 슬픔이라 할지라도” 등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유효한 내용이다.

불행하게도 역사는 코르차크의 기록을 그리 많이 남겨두지 않았다. 코르차크가 1940년 말부터 1942년 중반까지 갇혀 지낸 바르샤바 게토는 그가 죽고 1년 뒤 파괴됐다. 코르차크가 이런저런 생각을 세밀한 글씨로 적어놓은 공책, 보관하고 있던 편지와 기념품, 아이들의 수면 패턴을 관찰한 기록, 아동발달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30년간 모은 키와 몸무게 차트, 구상하고 있던 책들의 초고는 모두 사라졌다. 코르차크의 유년기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그의 부모와 여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줄 만한 친척과 어릴 적 친구들은 모두 수용소에서 죽었다.

[책과 삶]‘작은 심장’을 사랑한 아동인권의 선구자

코르차크의 유품·원고·기록은
사라지고 유족도 사망했지만
작가 베티 진 리프턴은
끈질긴 고증과 취재로
그의 위대한 삶을 복원했다

작가이면서 심리치료사인 베티 진 리프턴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 코르차크의 삶을 복원해냈다. 홀로코스트를 피한 코르차크의 아이들을 만나 기억을 끄집어냈고, 폴란드와 이스라엘의 기록보존소를 뒤져 코르차크와 알고 지낸 사람들의 회고록 속 몇 줄을 건져냈다. 소설을 비롯해 코르차크가 출간한 책 24권, 신문과 잡지에 쓴 기사 1000여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60여통, 그리고 그의 사후 게토 밖으로 반출돼 바르샤바 교외 고아원 외벽 속에 밀봉돼 있던 생애 마지막 몇 달간의 일기도 참고했다.

코르차크의 마지막 모습을 본 고아원 교사 미하우 브루블레프스키는 리프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말이죠. 다들 선생님이 아이들과 열차를 타기로 한 그 결정을 그렇게 대단하게 얘기하는데, 선생님은 평생 도덕적 결정을 하며 산 분이에요. 소아과 의사가 되기로 한 결정도 그렇고, 의사와 작가 일을 접고 가난한 고아들을 보살피기로 한 결정도 그렇고, 유대인 고아들과 함께 게토에 들어가기로 한 결정도 그렇고. 트레블링카에 아이들과 같이 가기로 한 그 마지막 결정은, 그분이 원래 그럴 사람이었어요. 그분 자체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지금 사람들이 왜 이렇게 호들갑 떠는지 선생님이 보면 이해를 못하실 거예요.”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3062043005&code=960205#csidx5e9b14852e757ea9caa6a99011de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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