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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들을 품은 티베트 '고아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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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13 09:35:58

1959년 티베트 '라싸 교전'으로 부모형제를 잃고 독일에 입양 간 만 7세 고아소녀 텐돌 걀주르는 40대 초 고국으로 돌아가 고아원을 열었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거리의 아이들에게서 그는 유년의 자기를 보았을 것이다. 중국과 티베트 정부의 감시와 통제를 감당하며, 동포들의 지탄까지 받아가며 고아들을 위해 남은 생을 바쳤던 그가 별세했다. 위키피디아.

 

 

7세 소녀, 고아 난민이 되다

1959년 3월 10일 시작된 티베트 독립 봉기와 20~24일의 ‘라싸 교전’으로  티베트 자치정부가 결딴났다. 달라이 라마는 망명했고, 승려 등 티베트인 8만 7,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교전’이란 말은 사실 적절치 않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저지른 사실상 제노사이드였다. 난민인권센터에 따르면 ‘교전’ 이후 지속된 학살까지 그해 숨진 사람만 최소 50만 명이고, 더 많은 이들이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또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다. 정세 격변기마다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오지의 척박함 덕에 누려 온 폭넓은 자치 권한도 함께 사라졌다. 국토 약 절반이 인근 칭하이, 간쑤, 쓰촨, 윈난 성에 편입됐고, 남은 영토도 이름만 ‘티베트 자치구(TAR)’일 뿐, 베이징 중앙권력에 장악 당했다. 티베트는 홍콩과 더불어 ‘반 중국 분리독립 정서’가 거센, '잠재적 소요지역'이어서, 수도 라싸는 지금도 “CCTV로 빠짐없이 감시 당하고 사원에는 중국 군인들이 가짜 승려로 들어가 감시”하며 “누구 하나 자유를 이야기하면 연좌제로 마을 전체가 처벌 받는” 곳이다. 그 현실을 고발하며 2009~18년 10년 사이 152명이 분신해 130명이 숨졌다.

59년의 난리통에 수만 명이 히말라야 설산을 보름 넘게 넘어 부탄과 미얀마, 인도로 피신했다. 7세 고아 소녀 텐돌 걀주르(Tendol Gyalzur)도 그 난민 행렬 안에 있었다. 그는 독일의 한 고아원에서 성장해 간호사가 됐고, 결혼 후 스위스에 정착했다가 1993년 티베트로 돌아가 고아원을 설립했다. 어떤 과거는 각자의 마음 속에 영원한 현재로 박제된다. 그는 관광객들에게 손을 벌리고 쓰레기통을 뒤지는 티베트 아이들에게서 유년의 자신을 보았다.

유럽서 성장한 스위스 국적의 티베트 난민 여성이, 개인 자격으로, 중국 당국의 고아원 설립 허가를 얻는 건 히말라야를 넘는 것만큼 힘겨운 일이었다. 해외 후원금으로 운영될 보육ㆍ교육 시설인 만큼 가뜩이나 불온한 지역에 분열의 씨앗을 퍼뜨릴 수도 있었다. 걀주르는 부모형제의 원수인 중국 당국의 환심을 사야 했고, 협력도 해야 했다. 그런 그를 언짢아 한 동포들이 적지 않았고, ‘민족의 배신자(blood traitor)’라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훗날 걀주르는 “내 종교는 아이들의 코를 풀어주는 것이고, 내 사상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건 진심을 몰라주는 동포들을 향한, 에두른 항변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93년부터 2018년까지 만 25년 동안 300여 명의 아이들을 혈통 종교 피부색 안 가리고 거두어 먹이고 가르치고 독립시켰다. 그 많은 아이들을 모두 기억해 ‘이름’으로 불렀던 티베트의 가장(家長) 텐돌 걀주르가 5월 3일 코비드19로 별세했다. 향년 68세. 

 

1959년 3월 티베트 라싸 봉기. 자치 독립을 위한 티베트 인의 봉기는 8만 7,000여 명 희생자를 남기고 만 나흘 만에 진압됐다. 중국 당국은 저 사건을 '교전'이라 부르지만, 사실상 학살이었다. AP 연합뉴스

 

59년은 티베트 현대사뿐 아니라 걀주르 개인사에서도 거대한 분기점이자 단절이었다. 그는 59년 이전을- 부모 이름도, 자기 생년월일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어떤 자료와 기사는 그의 부모와 오빠가 난리통에 숨졌다고 소개했지만, 어떤 기사는 그들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고 썼다. 하지만 그는 피난 행렬에 운 좋게 끼어 눈 덮인 산맥을 넘는 동안 한 낯선 여성이 자기를 챙겨주었다는 것, 잠깐씩 노새 잔등에 얹혀 가기도 했다는 것, 늘 배고프고 힘들었다는 것은 잊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고된 피난길에도 가족과 함께 있는 또래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웠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2주 넘게 걸어 인도 북부 다람살라의 한 고아원에 수용된 그는 3년 뒤 달라이 라마의 주선으로 또래 11명과 함께 독일로 입양됐다. 난민 아이들만 집단 수용해 교육시키는, 은퇴한 의사 부부가 운영하던 독일 남부 콘스탄츠(Konstanz)의 ‘루돌프 슈타이너 스쿨’ 이었다. 27세의 달라이 라마 텐진 갸쵸가 입양 가는 아이들에 했다는 당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꽃씨가 되어 훗날  티베트에서 꽃을 피우라”- 도 그는 잊지 않았다. 난민ㆍ이민 당국은 걀주르의 젖니를 세어 나이를 추정, 그의 여권에 ‘1951년 12월 2일 생’이라 기록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꽃씨가 되어
훗날 티베트에서 꽃을 피우라”

 

 

그의 독일행은 고아여서 얻은, 어쩌면 행운이었지만, 또 한 번의 생의 단절이었다. 의지와 무관하게 내던져진 낯선 환경. 언어와 종교와 문화의 혼란. 물론 차별도 그를 주눅들게 했다. 당시 서방 세계는 난민ㆍ이민에 상대적으로 관대했고 공산권 난민은 심지어 환대했다. 그들은 체제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간호대학을 나와 외과 간호사로 일하던 걀주르는 70년대 초 티벳을 탈출해 스위스 국적을 얻은 14년 연상의 전기 기술자 로상(Losang)을 만나 72년 결혼했다. 부부는 스위스 취리히 호숫가 마을 요나(Jona)에 정착, 73년과 75년 두 아들 송첸(Songtsen)과 가덴(Ghaden)을 낳았다. 걀주르가 혼자 티베트로 떠나 고아원을 짓고 새 삶을 시작하던 93년, 그의 두 아이는 어머니를 선뜻 보내줄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독일-스위스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20대 시절의 텐돌 걀주르. 가족 제공, 뉴욕타임스.

 

걀주르는 3년 전 관광차 라싸를 방문했다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들을 처음 보게 됐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에 갔다가, 막아서는 주인과 싸우다시피 해서 밥을 먹일 수 있었다고 했다. 훗날 그는 “내 생애 처음, 그 순간 비로소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이 뭔지 깨달았다”고, “세상 어디나 고아들이 있겠지만, 내가 티베트인인 만큼 그곳 아이들을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150여 명 대가족의 가장이 되다

남편과 아이들을 먼저 설득하고, 친지 등에게 계획을 알려 도움을 얻고, 중국 중앙ㆍ지방 정부와 협상하고, 관이 요구하는 온갖 서류들을 만들어 제출하고, 땅을 찾고 건물을 짓는 일들을 그는 거의 혼자 해냈다. 통장 깬 돈 2만 8,000 달러와 남편 연금, 이리저리 기부 받은 돈으로 그는 93년 라싸 변두리(Toelung)에 첫 고아원을 지었다. 그리고 3년 전 안면을 익힌 아이들까지 고아 6명을 첫 식구로 맞이했다. 티베트 문화에서는 다른 씨족의 아이들을 거두는 일 자체가 무척 생경한 일이라고 한다.

걀주르가 1993년 처음 문을 연 라싸 교외 고아원. Children's Charity Tendol Gyalzur.

 

관광 수입에 재정을 크게 의존해 온 티베트 정부로서는, 겉으론 까탈을 부려도 속으론 걀주르가 고마웠을지 모른다. 경찰 등 공무원들은 거리의 아이들을 보이는 족족 고아원으로 데려왔다. 식구는 이내 50명이 넘는 대가족으로 커졌다. 중국 정부의 ‘티베트개발재단(TDF, 87년 설립)’이 운영비 일부를 보태주기 시작했다. 4년 뒤 걀주르가 남편 고향인 윈난성 쿤룬산맥의 세계적 관광지 ‘샹그리라(옛 지명 중뎬)’에 두 번째 고아원을 지을 땐 지방 정부가 시설 부지를 무상 제공했다. 걀주르는 2002년 쓰촨성 리탕현에 기숙사를 지어 유목민 아이들의 교육 사업도 후원했다. 10년 뒤인 2003년 세 곳에 깃들인 아이들은 183명(여아 81명)으로 불어났다.

걀주르의 고아원에는 교육시설이 없었다. 예산도 빠듯하고 당국의 통제ㆍ감독 문제도 있었겠지만, 아이들을 일반 학교에 다니게 함으로써 지역 사회에 섞이게 하자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대신 6세 미만 아이들에게는 중국어와 영어, 티베트어를 가르쳤고, 전통무용 등 티베트 문화 교육은 병행했다. 국경 인근인 샹그리라 고아원에선 한족을 비롯해 7개 민족 아이들이 한 가족을 이뤄 지냈다. 그는 “혈통 피부색 종교 그 무엇도 우리 식구가 되는 데 변수가 안 된다. 보호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아이면 다 된다”고 말했다.

위탁아동 시설의 일반적 관행과 달리, 걀주르는 아이들을 입양 보내지도, 나이가 찼다고 강제로 내보내지도 않았다. 자기처럼 아이들이 또 한 번 삶의 단절을 겪게 하기 싫어서였다. 아이들은 서로를 언니 오빠라 부르며 설거지 등 가사를 나눠 했고, 나이가 찬 아이들은 보모나 교사로 일하고, 더러는 유학을 갔고, 직장을 얻고 결혼해서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놀러 오기도 했다.

그런 크고 작고 기쁘고 슬픈 소식들을 걀주르는 매년 보고서에, 당연히 아이들의 실명을 담아, 당국과 후원자들에게 알렸다. 20주년이던 2013년 걀탕 고아원 보고서의 마지막 항목은 “우리 시설의 가장 몸집 작은 식구였던 고양이 한 마리가 숨져 모두 함께 애도했다”는 거였다.

 

티베트의 명소가 된 걀주르 고아원

그렇게 터를 잡고, 신뢰를 얻게 되면서 지방 정부들은 보모 등 시설 인력의 급여 일부와 아이들의 옷, 음식, 교통비 등을 지원했다. 2009년 인터뷰에서 걀주르는 한해 운영비로 약 28만 달러가 든다고 밝혔다. 그 돈을 모으느라 그는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 등지의 시민들과 후원기관에 상시적으로 손을 벌려야 했다. 2013년 보고서에 그는 ‘양호실을 짓고 양호교사를 채용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썼다.

여행 전문지 ‘론리플래닛’은 티베트 가이드북에 샹그리라의 고아원을 ‘현지 문화를 알고 티베트인을 돕고 싶은 이들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10곳 중 한 곳’이라고 소개했다. 여행자들이, 후원자들이 고아원에 들러 자원봉사도 하고, 외국 대학생들이 방학 기간 동안 찾아와 돕기도 했다. 미국 시애틀에 사는 릭 몽고메리(Rick Montgomery)도 2001년 여행 도중 걀주르를 알게 된 뒤 매년 음식과 담요 식료품 자전거 등을 지원했고, 2007년 아예 국제 어린이 후원 NGO인 ‘Global Roots’를 설립했다. 몽고메리는 자신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이로 걀주르를 꼽으며 “그는 내가 지금껏 만난 가장 놀랍도록 이타적인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남편 로상도 은퇴 후 아내의 일에 합류했다. 꽤 능숙한 승마인인 그는 아이들에게 승마를 가르쳤고, 샹그리라의 아이들은 연례 승마 페스티벌에서 여러 개의 상패를 타오곤 했다. 걀주르는 사무실 벽 가족 사진들 사이에 그 상패들을 걸어두고 자랑하곤 했다.

10~20대 시절 내내 주말마다 스키 여행을 떠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아버지와 함께 집 앞에 좌판을 펴놓고 샤발레(Shabale, 군만두처럼 생긴 티베트 전통음식)를 팔아 어머니 후원금을 벌어야 했던 장남 송첸은 스위스 프로 아이스하키 선수가 됐고, 2008년 은퇴 후 샹그리라로 이주해 “해발고도 3,300m의 지구에서 가장 높은 맥주 브루어리 공장”과 카페 두 곳을 개업했다(동영상). 종업원 열에 여덟은 형, 누이, 동생으로 함께 자란 고아원 출신이었다. 스위스에 남은, 경영학을 전공한 동생 가덴도 회계 등 어머니의 일을 거들었다.

중국 입법기관 전국인민대표회의는 2003년 가을 국내 4,000여 개 자선기관ㆍ단체를 평가, 우수기관 400곳의 대표자를 북경에 초대해 치하했다. 티베트에서 초대장을 받은 건 갈주르 뿐이었다. 그런 일들이, 중국 정부의 억압에 항의하며 몸에 불을 붙이는 이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배신'이기도 했을 것이다. 걀주르와 고아원 시설의 미담은 티베트의 평화를 치장하는 장식품이었다. ‘설원의 용: 1947년 이후 현대 티벳의 역사(1999)’라는 책을 쓴 캐나다 브리티시콜롬비아대 교수 체링 샤캬(Tsering Shakya)는 걀주르를 ‘실용주의자’라 평했다. “각자의 정치적 입장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티베트에서도) 바닥서부터 시작되는 긍정적 변화가 필요한 때가 됐다”고 말했다.

2009년 인터뷰에서 걀주르는 “어릴 적 나는 중국인에게는 심장도, 사랑도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안 그렇다는 걸 알게 됐다.(…) 정부 당국은 우리 일에 힘을 보태고 있고, 내 생각엔 그것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에게서 참 많은 것을 배운다.(…) 누구든 그들을 보면 누구나 평화롭게 어울려 지내는 법을 배울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아이들을 두고 떠나다

2016년 5월 중국 전인대 제12회 상무위원회 20차 회의는 ‘해외 NGO 국내활동 관리법’을 제정했다. 중국 국내에서 활동하는 교육, 경제, 환경, 문화 법률, 체육, 복지 등 거의 전 부문의 해외 영리ㆍ비영리 단체 및 기관 상시 활동에 대한 국무원 및 성급 공안기관의 허가ㆍ감독을 법제화하고, 당국이 인정하는 국내 기관의 보증을 의무화한 거였다. 홍콩 민주화운동 등서 비롯된 외부 불안요소의 유입을 원천 차단하고 더 강력하게 통제하려는 취지였다.

걀주르의 시설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늘어난 문서 작업 때문에”, 또 “(아이들에게) 더 나은 여건을 제공하기 위해” 걀주르는 2017년과 18년 차례로 시설들의 문을 닫았다. 아이들은 정부 시설에 나뉘어 수용됐다. 그는 스위스로 돌아온 뒤로도 중국 정부를 원망하거나 비판하는 말을, 결코 공개적으로는, 한 적이 없었다. 떼어 놓고 온 아이들을 다시 만나려면, 이제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실제로 그는 이후 수 차례 아이들을 만나러 가곤 했다. 걀주르가 숨졌고, 아이들이 다시, 고아가 됐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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