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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아라고 밝히기 싫다"는 반대를 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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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20:56:06
[인터뷰②] 고아권익연대 전윤환 대표

[오마이뉴스 김지영 기자]

[지난 6월 11, 12일 양일간 고아권익연대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십여 년 전 보육시설에서 퇴소한 그의 증언은 과거 야만적인 시설에서의 인권 상황을 참담하게 보여줍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불과 한 달 전 부산의 한 보육시설에서 만연했던 성추행 사건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이 부산시의회에서 열렸습니다. 이 인터뷰 글은 그러한 일들이 한때는 시설 안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일상이었음을 가슴 아프게 증언합니다. 그의 증언을 2부로 나누어 소개합니다. 이 기사는 그 두번째입니다. 고아권익연대는 시설출신 당사자들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단체입니다. -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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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아원. 만으로 36개월을 살다 입양이나 친권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이 아이들은 보육원으로 가서 18세가 될 때까지 시설 아이들이 된다.
ⓒ 김지영

나는 입양 부모다. 풍족하진 못해도 부족함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초등학교 5학년짜리 삶을 잘살고 있는, 내겐 금쪽같은 딸아이가 12년 전 그 해 태어난 지 이십칠일 만에 입양되지 못했다면, 가야 할 곳은 영아원이었다. 거기서 만으로 36개월을 보낸 후 옮겨지는 곳이 보육시설이다.

일곱 살에 엄마와 헤어지고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고아권익연대 전윤환 대표가 살았던 곳. 기합과 폭력, 허기와 성추행으로 얼룩진 야만의 고통으로 기억되는 그곳. 지금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단어에 한을 담아 뱉어내는, 그가 살아내야 했던 곳. 고아원이었다.

1998년 대학에 합격하자 원장은 그를 불러 등록금을 자비로 우선 내주겠다고 했다. 입학금까지 180여만 원이었다. 갚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감사한 마음이었다. 만 18세가 시설퇴소 연령이었고, 대학생들에게는 몇 년의 유예기간을 더 주었다. 2001년이 그가 공식적으로 시설을 퇴소하는 해였다. 시설 출신들에게 정부에서 주는 자립정착금이 당시 300만 원이었다. 그는 그걸 최근까지 잊고 살았다. 혼자 세상을 헤쳐가느라 생각할 새도 없었다.

불과 얼마 전 그는 은행을 방문하여 이전 기록을 찾아내서야 알았다. 자립정착금의 존재만이 아니라 그도 모르게 자신의 이름으로 1996년 통장이 만들어져 2002년까지 시설에서 몰래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거기에 알 수 없는 암호처럼 크고 적은 돈들이 들락날락했다. 정부에서 지급된 자립정착금 300만 원이 들어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원장이 준 등록금을 갚지 못한 부채감에 그는 처음부터 시달릴 이유가 없었다. 어떡하든 떼어먹을 수 없는 돈이었다. 오히려 원장은 그에게 남은 돈을 돌려주어야 할 채무자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건 그가 모르는 통장이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돈들이 수도 없이 들어왔다가 나간 흔적이었다. 오직 시설에만 살아 바깥세상의 이치를 전혀 알 수 없었던 시절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가 시설에서 나와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는 전혀 낯선 세상에 홀로 떨어진 존재였다. 시설 바깥의 세상을 그는 살아 본 경험이 없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처럼 그는 모든 것을 다시 배워나가야 했지만, 문제는 그가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시설 안에서 유소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는 동안 몸에 밴 정서와 습관들은 그에게는 낙인이었다. 그 낙인은 오랜 세월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삶을 괴롭혔다. 겨우 울타리 하나로 갈라져 있었지만, 시설과 세상은 전혀 다른 별개의 우주였다.

대학 시절 내내 그는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을 주위에 밝히지 않았다. 그들의 정서를 알 수 없었고 자신의 정체를 전부 보여주는 것도 꺼렸다. 그러기엔 지나온 삶이 너무 달랐다. 그들과 함께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그들에게는 있었고 그에게는 없었다.

만으로 18세 생일을 맞이한 친구들도 차례로 시설을 나와 세상 속으로 섞여들었다. 가족도 일가친척도 없는, 혹은 있어도 없는 것과 매한가지인 그들은 홀로 혹독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정부에서 주는 자립지원금 300만 원이 그들이 가진 전부였다. 그 돈으로 방을 얻고, 살림살이를 사고, 취업준비까지 해결해야만 했다. 돈도 배움도 없었던 친구들에게 세상이 허락한 직업은 건설현장 잡역부나 식당 일이었다. 시설에서 나온 여자아이들은 이른 나이부터 주로 유흥업소로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디에서 무슨 이름으로 살고 있는지는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꼭꼭 숨어버리기 일쑤였다.

복지관 취업, 3개월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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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설에서 만들어져 몰래 사용되었던 통장 내역. 최근에 그는 이 사실을 알았다. 자립정착금은 원래 그의 몫이었다.
ⓒ 전윤환

시설에서 대학을 간다는 것은 당시에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이후의 삶은 모든 걸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처절한 현실이었고 사투였다. 문제는 항상 돈이었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주류 유통회사에 갔어요. 술을 마시는 건 싫어하지만 나르는 건 자신 있었어요. 술병을 채운 박스를 한꺼번에 몇 개씩을 등에 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노가다 중에 상노가다였어요. 일주일을 못 버틸 거라고 하지 말라고 했어요. 제가 말했죠. 50마지기 농사를 했다고. 사실이었어요. 시설에 있을 때 원장이 시킨 일 중 하나였거든요. 별장 짓는데 돌 옮기는 것도 지겹게 했고요, 또 양계장에서 닭 수백 마리를 닭장차에 집어넣는 일도 했어요. 그땐 종일 일하고 겨우 만 원 받았어요. 분명 더 주었겠지만, 나머지 돈은 알 수 없죠."

주류회사에서만 꼬박 일 년을 채워 일했다. 복학하고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복지관에 취업했다. 하지만 3개월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무척 안타깝고 당황스러운 이유였다.

"못 견뎠어요. 회의해야 하는데 못하겠는 거예요. 회의해본 적이 없었어요. 시설에 살 때는 명령과 복종밖에 없었으니까요. 명령에 익숙하고 의사 표현이라는 걸 해 본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회의 자리에 둥그렇게 앉으면 절로 오금이 저리고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어요. 대학 생활도 거의 혼자 지내다시피 했으니 그게 나아질 상황은 아니었죠."

- 시설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받은 차별은 없었나요?
"이력서 때문에 직장에서는 숨길 수가 없었죠. 처음엔 다들 동정심으로 보기 시작해요. 하지만 저를 겪어보면 금방 파악이 되는 거예요. 논의하면서 자기 의견을 말하고 동료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그런 힘이 전혀 없었어요. 정서적으로 사람들하고 어울리지도 못하고요. 게다가 여섯 시 퇴근 시간 되면 칼 같이 나가버리고요."

수습 딱지를 떼는 3개월이 지나기 전에 사실상 권고사직을 당했다. 백수 생활이 이어지다 겨우 잡은 직장이 사회복지 계통에서는 거친 일에 속하는 노숙인 쉼터 상담사였다. 일 년을 채워 일했다. 이때도 회의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업무적으로는 저평가를 받았고 주로 청소나 정리 같은 허드렛일을 열심히 했다. 과거 시설에서 얻은 폭력의 트라우마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대학 때는 잘 몰랐는데 사회에 나오니까 그때부터 진짜 고아더라고요. 주위에 조언해줄 사람은 없고 그저 맨땅에 헤딩인 거죠. 차라리 몸 쓰는 일은 잘하겠는데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상담하며 조언을 주는 일은 시설에서만 살아온 저에게는 한계로 느껴졌어요.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있는 평범한 삶의 이력이 제겐 빠져 있는 거죠. 그런 기초가 없으니 제가 버틸 수가 없는 거예요."

유일하게 말이 통하고 의지가 되었던 시설 친구들도 이십 대 10년 동안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고 있었다. 모두가 도움이 필요했지만, 모두가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 역시도 교회 후배들과 월세방에 함께 살며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홀로 세상에 던져진 그가 기댈 유일한 피신처는 교회였다. 그 안에서 외로움을 이겨냈고, 그 안에서 세상의 몹쓸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다.

노숙인 쉼터를 그만두고 새롭게 복지관에 자리를 얻었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관계의 어려움과 회의에 대한 공포 때문에 또다시 일 년을 채우지 못했다. 그는 사회복지사가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다는 회의를 느끼고 진로를 고민하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서울 강남에서 도시락 배달을 했다. 그걸로 등록금을 냈고 생활비를 댔다. 모자라는 돈은 빚을 내서 해결했다. 공부와 일로 빠듯한 3년 세월을 그렇게 보냈다. 스물아홉이 되던 해 2월,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의 이십 대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학교 후배였던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한 뒤였다.

젊었을 때 입양을 꿈꾸었던 장모님과 시장에서 비닐봉지를 팔며 가난하지만 화목하게 집안을 이끌었던 장인어른은 고아로 자란 그를 입양한다는 마음으로 사위로 받아주었다.

재산은 천만 원 빚이 전부, 그래도 행복했다

가진 재산이라곤 천만 원에 달하는 빚이 전부였다. 방 한 칸 마련할 돈도 궁해 혼자 독립해 사는 처남 집에 얹혀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대리운전을 시작하고 일 년 만에 빚을 다 청산했다. 다시 육 개월 만에 처남 집에서 나와 반지하 방을 얻었다. 방을 얻고 남은 돈이 없어 낡아 빠진 싱크대를 그대로 쓰기로 하고, 밖에서 주워온 철봉으로 옷장을 만들었다.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얼룩진 천장이 바로 보이는데도 아내와 단둘이 있는 공간이 행복으로 가득 찼다. 절로 눈물이 흘렀다.

첫 아이가 태어난 건 결혼하고 3년 뒤였다. 전도사로 있을 때였다. 아내도 교회 행정직으로 취업해 형편이 나아지고 있었다. 그해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하지만 어렵게 찾은 전도사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불의를 참지 못하고 손버릇 나쁜 청년들에게 내가 시설에서 당했던 폭력을 습관처럼 가했다. 순간 욱해지는 성질은 몸에 달라붙어 끈덕지게 떨어지지 않았다. 좋은 목회자를 꿈꾸었지만 스스로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강남에 따로 방을 얻어 살며 독하게 돈을 벌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굶기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그러기를 육 개월, 다시 아내의 권유로 택시회사에 들어갔다. 아내는 돈보다 가족들이 모두 함께 있는 일상을 원했다. 3년을 무사고로 보내고 개인택시를 샀다. 택시는 그에게 맞는 직업이었다. 회의 때문에,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일이 없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고 일한 만큼 돈이 벌렸다.

개인택시 3년 만에 장애인 콜택시에 지원했다. 오만대 중에 오십대 정도로 경쟁률이 치열했다. 합격할 수 있는 경력이 아니었지만, 합격할 수 있었던 데는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의 효과가 컸다. 개인택시로 호출이 오면 비 휠체어 장애인을 태워다 주는 일이었다. 그사이 둘째가 태어났다.

다른 사람보다 일찍 일어나 일을 시작했고, 다른 사람보다 늦게 집에 들어갔다. 400만 원대 중반으로 벌이도 좋았고, 새로운 사실도 깨달았다.

"장애인들은 건강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아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고요. 몸은 불편하지만, 영(靈)은 참 맑고 깨끗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고아원에서 자라 온 내 영(靈)이 장애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부모님들도 그 자녀들을 많이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해요. 부러웠고, 제 부모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막 차오르는 거예요. 근데 저는 만날 방법이 없잖아요. 마음이 점점 아프기만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시내에서 호출을 받고 손님을 태워 경기도 양주에 있는 납골당에 내려주고 대기하고 있었다. 30여 분 시간이 남아 주위를 둘러보다 무연고자 납골묘 앞에서 한참 동안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름 미상, 생년월일 미상. 유일하게 적혀 있는 사실은 발견된 날짜와 시간이었다. 어쩌면 고아일 수도 있겠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 그렇다면 살아 있는 그의 이름은 정부 기관 어딘가의 호적 기록부 안에 남아 있을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생각은 가지를 치고 뻗어 나갔다. 어딘가에 있을 그의 진짜 이름이 삭제될 가능성은 그를 사망이나 실종신고를 했을 경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자인 그의 나이 만 19세가 되었을 때 병역을 위한 신체검사서가 발부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병역기피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을 것이고 일곱 살에 시설에 들어갔으니 역산하면 79년생 병역기피자의 명단 안에 그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일곱 살에 헤어진 엄마와 누나가 손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그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병무청, 행정안전부, 경찰서, 보건복지부 등으로 뛰어다녔다. 납골당에서 싹이 튼 희망의 씨앗 하나가 무럭무럭 자라 그의 일상을 파고들었다. 다른 것들이 비집고 들어 올 틈이 없었다. 택시 일마저 못 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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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4월. 고아권익연대를 출범하고 개소식을 열었다.
ⓒ 전윤환

납골당에서 우연히 시작된 생각의 끈

혹시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을 돕는 시민단체가 있는지를 알아봤지만 허사였다. 지금까지 시설 출신자를 위한 어떤 종류의 단체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정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설 안에서도 시설 밖에서도 시설 출신인들은 세상에 보이지 않는 존재였다.

가장 믿고 의지하던 시설출신 동료들을 불러모았다. 단체 설립에 대한 구상을 말했다. 모임의 중심이던 회장의 발언은 다시 한번 그에게 충격이었다.

"윤환아. 나 솔직히 고아라고 밝히는 거 싫다. 그게 밝혀져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다. 지금 직장에 취직할 때도 일주일 걸리면 될 일을 석 달이 걸려 어렵게 들어가야 했다."

모임 회장부터 반대하고 나서는데 어쩔 수 없었다. 그 모임에서는 만장일치가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원칙이 있었다.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누나를 찾아야겠다는 열망이 같은 처지의 시설 출신자들을 위한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이미 바뀐 후였다. 그에게 시설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이 그걸 대신 말해 주었다.

"시설에 수용된 그 자체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집단생활 자체가 말입니다. 가정에서는 한두 명에게 학대가 일어나지만, 시설에서는 학대도 집단으로 일어납니다. 그런 경우 인간의 모든 기능에 마비가 오고 남은 삶이 왜곡되어 버립니다. 어린 시절 지독한 기합과 폭력으로 제 머리에 깊이 패어 남아 있는 상처가 그걸 대신 말해 줍니다."

단체의 시작은 세 명이었다. 사무실을 얻고 집기를 들였다.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처남의 도움을 얻어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100만 고아의 하늘에 사무친 눈물, 고아권익연대'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시설 안에 있는 아이들과 시설 출신인들의 인권과 권익을 위한 시민단체의 탄생이었다. 시설출신 당사자들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다. 2018년 4월,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고아권익연대의 시작

그가 아는 시설 출신인들 중 70%는 전과자다. 그가 아는 시설 출신인들 중 여자들의 대부분은 사회생활을 유흥업소에서 시작한다. 혹시 이런 사실이 오히려 시설 출신인들에 대한 편견을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내비쳤다.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편견보다 진실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알리는 일이 중요하고요. 거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단절되고 20년 가까이 고아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그 왜곡된 삶을 치유하는데 앞으로 20년이 더 걸립니다. 제가 그나마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문제를 피하지 않고 스스로 인정하고 고치려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시설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당신의 삶이 아픔이었고 상처였다는 사실을. 그걸 스스로 알고 느껴야 치유가 되고 건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건 일반인들이 겪지 않아도 되는 과정이고 시설 출신인들은 반드시 겪어야 하는 가슴 아픈 과정이기도 합니다."

고아권익연대는 현재 회원 수가 200여 명에 이르렀고 관련된 시민단체들과 업무협약을 맺어가고 있다. 지금 전윤환 대표의 가족 찾기는 거의 성사 단계에 와있다. 일곱 살에 헤어진 엄마와 아빠 그리고 착하고 예쁜 모습으로 기억되는 누나 마리아의 손이 곧 그의 손에 닿아 따뜻한 온기로 전해질 날이 머지않았다. 전윤환 대표의 여운이 긴 마지막 말이다.

"시설 아이들의 간절한 꿈은 엄마아빠가 있는 가정입니다. 모든 아이는 가정에서 자라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관련기사 : 엄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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