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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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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5 16:00:18
[지난 6월 11, 12일 양일간 고아권익연대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십여 년 전 보육시설에서 퇴소한 그의 증언은 과거 야만적인 시설에서의 인권 상황을 참담하게 보여줍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불과 한 달 전 부산의 한 보육시설에서 만연했던 성추행 사건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이 부산시의회에서 열렸습니다. 이 인터뷰 글은 그러한 일들이 한때는 시설 안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일상이었음을 가슴 아프게 증언합니다. 그의 증언을 2부로 나누어 소개합니다. 이 기사는 그 첫번째입니다. 고아권익연대는 시설출신 당사자들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인권단체입니다. - 기자말]
 
 고아권익연대 전윤환 대표. 시설출신 당사자들이 모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단체다.
 고아권익연대 전윤환 대표. 시설출신 당사자들이 모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단체다.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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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아로 자랐다. 이름은 전윤환, 올해 마흔 살이다. 이 이름으로 살기 시작한 지는 일곱 살 때부터였다. 그러니까 일곱 살 이전에 그는 고아가 아니었다. 한 살 위 누나가 있었고, 그때까지도 아낌없이 젖을 내어주던 엄마도 있었다. 서너 살 무렵 아빠가 무등을 태워주었던 기억은 선명한데,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그들은 이사를 많이 다녔고 매번 이사할 때마다 집은 초라해졌다. 함께 살던 누나는 사건이 있기 몇 달 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착했던 누나의 별명은 마리아였다. 누나가 사라진 걸 알았지만 왜, 어디로 가야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혹은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그처럼 엄마 손에 이끌려 다른 곳으로 가야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어느 날 엄마는 그를 데리고 할머니 집을 찾았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희미한 기억이지만 시골이었고 과수원이 있었다. 그곳이 외가인지 친가인지도 알 수 없다. 시골에서 돌아오던 길 엄마는 평소 그가 조르던 야구 옷을 사주었다. 프로야구가 미치도록 인기 있던 시절이었다. 때는 1985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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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어느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그를 의자에 앉혀 놓고 엄마는 아빠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만나고 다시 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 했다. 그는 엄마가 금방 돌아올 줄 알고 의자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줄곧 엄마가 다시 돌아올, 엄마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시간은 흘렀고 어둠이 내렸다. 엄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의 먹먹하고 아득하기만 했던, 죽을 만큼 엄마가 보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다. 바로 그 자리에서 엄마 손을 놓았던 그 순간, 그의 어린 삶은 아주 작은 몇 개의 기억 만을 남겨둔 채 잊혔다. 그리고 그는 고아가 되었다.

그러므로 일곱 살 작은 소년의 입에서 기록된 그의 이름 전윤환이 사실은 정윤환 일수도, 전윤한 일수도, 아니면 정윤한일 수도 있다. 그의 일곱 살 생애가 사라진 곳 어디쯤 함께 있을 그의 진짜 이름이 말이다.

고아가 되다

터미널에 울고 있던 그를 경찰이 데려간 곳은 아동일시보호소였다. 말로만 듣던 감옥 같은 곳이었다. 수백 명으로 어림짐작 되는 그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 보호소 안에는 늘 울음이 그치지 않았고, 우울한 기운이 감싸고 있었다. 보호소 어른들은 켜켜이 쌓여 있는 빨아 놓은 옷 중에 몸에 맞는 옷을 아무거나 갈아 입혔다. 수백 명의 아이가 옷을 공동으로 돌려 입고 있었다. 유일하게 엄마의 손때가 묻은 야구 옷도 그 속에 묻혀 사라졌다. 엄마와 함께 살던 세상도 함께 사라졌다.

몇 달 뒤 그는 한 무리의 아이들과 함께 차에 태워져 충남 부여의 시골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보육시설로 이송되었다. 일곱 살 여름이었다. 그리고 야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고등학생 선배가 집합을 시켰어요. 방안에 동그랗게 모였어요. 맞은 이유는 모르겠어요. '빳따'를 맞을 때는 항상 그렇게 집합해서 맞았어요. 한 대 맞으면 '악'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세게 맞았어요. 열 대 정도 맞은 것 같아요. 어리다고 봐주지 않았어요."

보육원은 콘크리트 2층 건물이었다. 총 여섯 개의 방에 팔십여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각 방에 생활지도원 선생님이 있었다. 전부 젊은 여성이었다. 한 방에는 서너 살 어린아이부터 고등학교 3학년 아이들까지 십여 명이 섞여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형이 그 방 대장이었다. 젊은 여자 선생님은 대장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불규칙하게 수시로 바뀌는 선생님보다 십여 년 원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대장의 힘을 더 무서워했다. 보이지 않는 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선생님은 잘 알고 있었다.
 
 시설에서의 간식시간
 시설에서의 간식시간
ⓒ 전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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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권익연대'는 올해 4월 이 사연의 주인공인 전윤환 대표가 보육시설의 인권과 시설 퇴소자들의 권익을 위해 만든 신생단체다. 시설 출신 당사자가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다. 나는 이 단체의 출발을 인터넷을 통해 우연히 발견했다. 마침 시설에 대한 취재를 시작한 직후였다. 홈페이지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몇 차례 만남을 이어오다 인터뷰를 제안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지난 6월 11일이었다.

비록 과거의 일이긴 해도 그가 퇴소한 90년대 중반은 지금부터 불과 20년 전이다. 그사이 보육시설의 상황이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더 많은 취재가 필요하다. 하지만 보육시설의 환경이 안락한 가구와 최신식의 가전제품으로 바뀌었어도 아이들은 여전히 부모님의 사랑이 아닌, 관리가 효율적인 집단생활을 해야 한다. 그 단순한 차이가 한 사람의 영혼에 얼마나 커다란 상흔으로 남아 평생을 옭아매는지를 나는 짐작만 할 수 있었다. 단지 부모가 있고 없음으로 인해서 말이다.

시설의 기억

- '빳다' 맞을 때 서너 살 먹은 어린아이들도 다 같이 맞았어요?
"네. 다 맞았던 건 같아요. 맞는 게 일상이었어요. 새로 아이들이 오면 울잖아요. 신고식을 해요. 이불을 씌워서 울지 않을 때까지 나무자루나 야구방망이로 가리지 않고 때려요. (거기 질서에) 길들여야 하니까요."

어쩌면 엄마 젖도 만져보지 못한 서너 살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첫 기억이 공포와 폭력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 맞고 나면 어떤 느낌이었어요?
"멍하죠. 그리고 내 생각과 가치관이 무너지죠. '아, 절대 복종해야겠구나.' 그런 생각만 들죠.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해도 선생님들이 도와줄 수가 없어요. 신호를 보낸다는 은어를 썼는데, 선생님들에게 신호를 보내면 다음 날은 아예 산으로 끌고가서 때리는데 그땐 정말 거의 죽겠다 싶을 정도로 때렸어요. 제가 아는 한 선배는 호미로 머리를 찍혔는데 그 뒤로 간질을 앓기 시작했어요. 폭력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심했는지 안 맞는 날은 더 불안하고 차라리 맞고 드는 잠이 오히려 편안할 정도였죠.

학교를 끝나고 원에 들어가는 게 무서웠죠. 집합해서 '빳다'를 맞거나 한강철교(여러 사람이 엎드린 자세에서 뒤 사람 등에 발을 올리고 앞으로 기어가는 기합)같은 군대식 기합을 많이 받았어요. 특히 모서리에 머리 박고 몇 시간을 버티는 것은 기본이었죠. 지금도 머리에 자국이 남아있을 정도니까요."

조심스레 동의를 구하고 머리를 만져보았다. 정수리와 이마 사이 정확하게 중간 부분에 칼날로 힘껏 내려친 듯 깊이 팬 자국이 선명하게 만져졌다. 충격이었다. 예상을 넘은 깊이였다. 날카로운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고통을 이겨내는 일곱 살 소년의 일그러진 표정이 그려졌다. 긴 세월이 아니면 남길 수 없는 잔인한 흔적이었다. 참담한 분노가 일었다.

더욱 참담한 일도 있었다. 맹목적인 폭력이 일상화된 공간에서 아이들의 자존감은 계량하기조차 한심한 처지였고, 성적 학대에 대해서도 사실상 무방비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저는 심한 편은 아니었어요. 선배가 유사성행위를 시키는 거죠. 주로 힘이 센 고등학생 형들이 그랬어요. 한 번은 고등학생 형이 초등학교 저학년 여자애를 골방으로 데려간 적도 있어요. 동생들은 망을 세워 놓고… 끝나고 나오면서 그 형이 여자애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주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져요."

"부모 없이 한데 모여 생활하는 아이들의 세계잖아요. 자라면서 누가 제대로 진심으로 가르쳐주지 않았으니까요. 그 안에서 성장하면서 가장 많이 접하고 보아온 것이 형들이거든요. 때리고, 뺐고, 기합 주고, 성추행하고요. 가끔 따뜻하게 대해 줄 때도 있지만 잠시뿐이죠. 관리자들은 우리에게 큰 관심이 없었어요. 형들의 그런 모습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들이 직접 질서를 잡아나가는 것보다 형들이 알아서 그래 주기를 바랐을 거예요."


살기 위해 싸웠고, 지키기 위해 때렸다
 
 초등학교 졸업앨범. 시설 안에서는 형들의 기합과 폭력에 시달렸지만 학교에서는 '짱'으로 통했다. 학교 안 싸움에서는 절대 질 수 없었다. 살아 남아야 했다.
 초등학교 졸업앨범. 시설 안에서는 형들의 기합과 폭력에 시달렸지만 학교에서는 "짱"으로 통했다. 학교 안 싸움에서는 절대 질 수 없었다. 살아 남아야 했다.
ⓒ 전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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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생활했던 시설이 유독 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안에서 함께 있었던 80여 명의 아이들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유일한 세계였다. 먹는 것도 형편없었고, 반찬이라고 할 수도 없는 도시락마저 선착순이었다. 학교에 가져가야 할 준비물을 챙겨본 적이 없다. 연필도 물감도 내 걸 써본 기억도 없다. 그나마 마음 착한 학교 선생님을 만나면 다행이었다. 집이 서울이었던 원장은 쉽게 볼 수가 없었고 내려와 있어도 직급 높은 관리자와 함께 별도의 건물에서 지냈다.

보육원에서 학교에서 그는 살기 위해 싸웠고, 지키기 위해 때렸다. 살아가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싸움을 잘했다. 체격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일찍 알았다.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싸우면 모두 이길 수 있었다. 배가 고파 가게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 돈을 빼앗았다. 어쨌든 그는 살아야 했다. 다만, 형들로부터 가해지는 폭력에는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뼛속 깊이 새겨진 그가 아는 유일한 세상의 질서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주말마다 예배를 봐주시던 할머니 권사님이 일요일 보육원 오시는 길에 숨지는 일이 있었다. 매번 형식적으로 참가하는 예배였지만 장례식날 정체 모를 어떤 느낌을 감지했다. 돌아가신 권사님의 뒤를 이어 예배를 주관하러 오신 분이 매일 성경 읽기를 할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라고 했을 때 그의 손이 번쩍 들려진 건 어쩌면 장례식 날의 느낌과 관계가 있는 거라는 생각을 지금도 떨치지 못한다. 실제 그는 매일 성경 읽기에 몰두했다.

그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그 일이 있고부터였다.

"저에게 기적이 일어났어요. 하나님을 안 믿는 분들은 모르시겠지만, 저에게 응답이 오는 느낌을 매일 받았어요."

싸움을 그만두고 공부에 집중했다. 성적은 가파르게 올랐다. 형들로부터의 집합과 기합과 폭력은 여전했지만, 그는 동생들 때리는 걸 그만두었다. 지금도 형제처럼 지내는 일곱 명의 친구들에게 폭력은 이제 그만 끝내자고 말했다. 원에서 몇 명 안되는 공부하는 학생이었지만, 그동안 동년배들 안에서 '짱'으로 살아온 그의 이력이 친구들과 동생들에게는 충분한 무게감이 있었다.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전보다 줄어든 건 역력했다. 지독한 폭력의 순환을 누군가는 끊어줘야 했다.

일곱 살에 들어와 십 년이 지났다. 사회복지와 신학을 전공하고 싶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보육원에 큰 변화가 생겼다. 원장과 관리자들의 부정과 부패가 세상에 드러났다. 정부는 개인재산을 어쩌지는 못하고 더는 아이들을 보내지 않는 것으로 징계했다. 인원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보육원 운영의 최소인원인 18명이 되었을 때 시설은 폐쇄라는 철퇴를 맞았다.

그를 포함한 아이들은 모두 경기도 양평의 다른 보육원으로 옮겨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보육원 원장은 이전 보육원 원장과 인척 관계였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되다
 
 같이 생활하던 시설아이들. 또래에 비해 키도 컸고, 공부를 잘했다.
 같이 생활하던 시설아이들. 또래에 비해 키도 컸고, 공부를 잘했다.
ⓒ 전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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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원은 새로운 곳이었지만 새로운 삶이 시작되지는 않았다.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보육원에서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폭력은 여전했고, 누가 누구를 성폭행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충청도 부여 산골짜기 보육원 안에서 원생들끼리 사용하던 은어가 경기도 양평에 있는 보육원 원생들이 사용하는 은어와 다를 게 하나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때는 어느새 1996년이었다.

특별히 기록할 것도 없는 똑같은 삶의 연속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전보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이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마치 지옥과 천국 같은 느낌이었다. 이전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 제대로 주지 않고 입을 것 제대로 입히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가야 할 지원금을 빼먹다가 탈이 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새로운 보육원은 비교적 시내와 가까워서 이전 보육원보다 찾아오는 봉사자도 많았다. 이래저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살아야 할 공간은 바뀌었지만, 그는 신앙과 공부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는 사회복지사와 신학이라는 분명한 꿈이 있었다. 그는 대학을 가야 했고, 시설을 나가면 일곱 살에 헤어진 어머니와 누나 마리아를 찾아야 했다. 버스터미널에서 그의 손을 놓은 건 어머니였다. 하지만 그는 단 한순간도 그 손을 놓지 못했고 잊지 못했다. 그가 어서 어른이 되어야 할 이유는 많았다.

힘든 고3 시절을 마감 짓는 시험을 치렀고 그는 강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했다. 당시 시설출신 대학진학률이 다섯 손가락을 밑도는 시절이었다. 대학이 아니라도 만 18세가 넘으면 어차피 나와야 할 시설이었다.

기합과 폭력, 두려움과 공포로 얼룩진 삶이었다. 대학 합격이라는 월계관을 쓴 그였지만 엄마와 헤어진 이후의 삶은 어차피 뒤틀린 후였다. 고아원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은 그에게 마냥 기쁜 일만은 아니었다. 바깥세상을 살아가는 일을 그는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엄마의 손을 놓쳤던 일곱 살 그때 그 먹먹하고 아득하기만 했던 마음이 새로 살아났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관련기사 : "솔직히 고아라고 밝히기 싫다"는 반대를 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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