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 fatherless to the Father "

아빠가 없는 자에게 하나님을!

공지사항

YES Daddy는 아동복지시설로서 진정한 영적 부모를 찾아주게하는 비영리 기관입니다.

게시글 검색
엄마 손 잡고 엄마 찾아왔지만... 엄마는 거부했다
yesdaddy 112.184.51.116
2019-06-05 23:46:10
22만 명, 한국 전쟁 이후 해외로 입양된 한국 입양인들의 숫자다. 최근 몇 년 사이 해외로 입양됐던 입양인들이 친부모를 찾아 한국을 찾는다. 우연한 계기로 입양인의 가족 찾기를 도왔던 평범한 한국의 여성들은 마음을 모아, 미국의 여성 입양인들과 함께 입양인을 돕는 모임 '배냇'을 만들었다.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입양인들을 미국과 한국의 회원들에게 소개해 준다. 그들을 돕다 보면 본의 아니게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부터 끝까지 생생히 지켜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해외입양인들의 슬픔, 기쁨, 아픔, 그리고 부끄러운 역사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 기자 말
 
엄마와 딸 지난 4월 엄마와 고국을 방문한 새라
▲ 엄마와 딸 지난 4월 엄마와 고국을 방문한 새라
ⓒ 김유경

관련사진보기


연분홍 벚꽃잎이 봄바람에 흩날리던 4월 12일, 노르웨이발 비행기 한 대가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새라(Sarah)가 터미널을 빠져나와 게이트를 통해 첫발을 내디뎠다. '코레아! 내가 태어난 바로 그 나라.' 눈 앞에 펼쳐진 풍경들이 낯설기 그지없다. 머리카락부터 눈동자 색깔까지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이 수없이 그녀 곁을 지나쳐 간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모두 나와 똑같이 생겼어!" 

새라는 수 십 년 전 해외로 보내진 입양인이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서 버려졌다. 대구에 있는 보육원에서 잠시 지내다가 태어난 지 7개월이 되던 무렵인 1984년 어느 날, 노르웨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4년. 이번 고국 방문은 태어난 지 34년 만에 처음 이뤄졌다. 생모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한국에 왔다. 고국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심장이 심하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을 누군가 다가와 다정하게 잡았다. 흔들리는 새라의 마음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바라보는 그는 바로 새라의 엄마였다. 그렇게 새라는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를 찾으러 왔다.

두 엄마
 
 34년 전, 씨그너는 오슬로국제공항에서 처음 새라를 만났다.
 34년 전, 씨그너는 오슬로국제공항에서 처음 새라를 만났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씨그너(Signe)는 새라의 양엄마다. 그녀에게 공항은 매우 특별한 곳이다. 34년 전 그녀는 오슬로국제공항에서 처음 새라를 만났다. 
 
 
"그날을 잊을 수 없죠. 우리 부부는 새라를 만나기 위해 몇 시간을 달려 공항으로 갔어요. 저 멀리서 갓난아이가 점점 다가오는데... 입양을 하기로 했음에도 생김새가 다른 아이가 앞에 나타나니 사실 당황스럽고 정신이 없어지더라고요. 하지만 5분도 안 돼 내 심장이 그 아이를 자석처럼 끌어안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 새라를 말이에요." 

옹알이를 하던 작은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소녀가 되고 숙녀로 자랐다. 이제는 어엿한 세 딸의 엄마로 성장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녀의 곁에는 늘 엄마 씨그너가 있었다. 생모를 찾고 싶다고 엄마에게 처음 털어놓은 것은 불과 3년 전이다. 

"자라면서 특별히 생모 얘기를 꺼낸 적이 없던 아이였죠. 그런데 지난해 한국에 생모를 찾으러 가고 싶다는 거예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새라의 마음에 그런 생각들이 서서히 들어왔던 것 같아요."
 
 새라는 자라면서 '정체성 혼란'이라는 깊은 늪에 빠졌다. 그 방황은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 치유됐다.
 새라는 자라면서 "정체성 혼란"이라는 깊은 늪에 빠졌다. 그 방황은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 치유됐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유년 시절 입양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서부터 새라는 '정체성 혼란'이라는 깊은 늪에 빠져 버렸다. 

"입양인들은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우리는 '뿌리가 없이 서 있는 나무' 같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그 방황이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였다.

"아이를 낳게 되면서 생각에 큰 변화가 생긴 것 같아요. 비록 저는 뿌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야 하지만 내가 이제 누군가의, 내 딸의 뿌리가 되었다는 생각. 그 생각이 저의 방황을 잠재워 준 것 같아요." 

지난 3월에 그녀는 첫 고국 방문 계획을 세웠다. 입양인들의 한국 방문을 곁에서 지켜볼 기회가 종종 있다. 그런데 그들의 여정을 지켜보다 보면 이 여행이 보통의 여행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해외 입양인들은 대체로 모국방문 시 누군가와 동행을 한다. 그것은 그 여행이 절대 혼자 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국 땅을 밟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감정의 파도는 생모를 찾아 떠나는 여정 속에 폭풍우가 되어 그들을 수도 없이 넘어트리고 주저앉힌다.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무게의 여정이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감당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 무게는 쇳덩어리보다 무겁고 아프다. 

이 힘든 여정에 함께 할 동반자로 새라는 엄마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엄마'를 찾으러 '엄마'의 손을 잡고 고국을 방문한다니 정말 기가 막힌 일이지만, 새라의 엄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두렵기도 했어요. 아이가 한국을 방문해서 생모를 찾겠다고 하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흔쾌히 동행해주기로 했죠. 새라가 생모를 찾게 되든 아니든 저는 모두 괜찮아요. 난 그저 새라의 엄마로 내 아이 곁을 지켜주고 싶었거든요." 

벚꽃 비가 온 세상에 흩뿌리며 내리던 4월 13일, 엄마는 딸과 함께 그녀의 또 다른 엄마를 찾아 고향인 대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 오기 전 새라는 사실 대구지방경찰청으로부터 생모를 찾았다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생모는 새라를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런데도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새라는 대구를 찾았다. 

대구에 머문 닷새 동안 새라는 엄마의 손을 잡고 엄마를 찾으러 대구 시내를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시장이며 공원이며 안 다녀 본 곳이 없다. '저 사람이 내 엄마일까?' 스쳐 지나가는 나이 든 아주머니들을 바라보면서 새라는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고 한다. 

새라는 잠시 머물렀던 보육원도 들렸다. 보육원은 새라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다. 서류에는 새라의 작명한 한국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그녀의 아기 시절 사진이 있었다.

댓글[0]

열기 닫기

공지&소식

상단으로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