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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입양한 부모가 제 '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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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6 19:44:44
"나중에 결혼하면 저도 아이를 입양하고 싶어요. 제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 싶습니다."
 

보통 입양하려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잘 키워야 돼. 낳은 자식과 비교되지 않게 키워야 돼. '입양되었기 때문에 저렇다'는 말을 안 듣게 해야지" 같은 생각을 한다. 그러나 정영범(29)씨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 자신이 입양인이기 때문이다.
  
국악앙상블 '블랙문'과 비파연주단 '비화랑'의 단원으로 활동하는 비파 연주가인 영범씨는 공개입양 1세대로, 전 한국입양홍보회(MPAK·엠팩) 회장 한연희씨의 셋째 아들이다. 그의 부모는 첫째 형 명곤을 낳은 뒤 아래로 그를 포함해 9명의 아이를 입양했다.
  
'거침없이 하이킥' 같은 우리 가족
 
2019년 미국에서 열린 한국입양홍보회 설립 기념 갈라쇼에서 비파 연주를 하는 정영범씨 2019년은 한국입양홍보회(엠팩) 20주년이자, 정영범씨가 입양된지 20주년 되는 해이기도 했다. 비파 연주가인 그는 미국에서 열린 기념식 갈라쇼에서 공연을 했다. 정영범씨는 스티브 모리슨 박사(해외입양인, 미항공우주국 근무)와 공동으로 엠팩의 초대회장을 역임한 한연희씨의 셋째 아들이다.
▲ 2019년 미국에서 열린 한국입양홍보회 설립 기념 갈라쇼에서 비파 연주를 하는 정영범씨 2019년은 한국입양홍보회(엠팩) 20주년이자, 정영범씨가 입양된지 20주년 되는 해이기도 했다. 비파 연주가인 그는 미국에서 열린 기념식 갈라쇼에서 공연을 했다. 정영범씨는 스티브 모리슨 박사(해외입양인, 미항공우주국 근무)와 공동으로 엠팩의 초대회장을 역임한 한연희씨의 셋째 아들이다.
ⓒ 정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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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그래서 더 재미있다"고 했다. 마치 예전에 방영된 드라마 <거침없이 하이킥>처럼 대가족이 함께 살아 에피소드가 많았다고 했다. 초코파이 48개가 든 상자 두 통을 사와도 다음 날이면 깨끗이 없어졌고, 큰 바나나 두 송이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고추장 된장은 베란다에 대용량 양철통을 놓고 퍼먹었다. 설거지는 남매가 분업을 했다. 담그는 팀과 헹구는 팀이 있었다. 세탁기는 1년 365일 멈춘 적이 없고, 마트에 가면 식당 하는 집처럼 엄청난 양의 장을 봐왔다.

물론 형제가 한 둘인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한번은 친구 집에 갔는데, 접시에 유부초밥이 쌓여있는 것을 보며 신기했다. 한 개 만들어놓기가 무섭게 사라져 항상 한두 개만 남아 있던 그의 집과는 너무나 달랐다. 암묵적으로 먹는 순서도 정해져 있어 어쩌다 누구 한 명이 연속으로 두 번 먹으면 눈총을 받았다. 외식은 꿈도 못 꿨다. 대량으로 사다가 만들어 집에서 먹는 게 훨씬 많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매가 비슷한 시기에 소풍을 가기 때문에, 소풍 철엔 김밥집에 가서 김밥 스무 줄을 사 왔다.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사달라고 선뜻 말하지 못했다. 한 사람이 사면 모두 다 사고 싶어지니 서로 참았다.

부러움이 서운함으로 이어졌을 법도 한데 그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충분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못 먹고 못 입지도 않았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게 해줬어요. 온 가족이 해마다 여름이면 바닷가, 겨울엔 스키장에 갔어요. 오히려 우리 가족이 다른 집보다 더 추억도 많고 행복했다고 생각해요."

9살 때 8살 친동생과 함께 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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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하면 정영범씨는 입양인이 아니다. 그는 가정 위탁의 형태로 자랐다. 생부가 친권을 포기하지 않아 정식으로 입양되지 못했다. 그러나 법적 지위를 제외하곤 그가 유연길, 한연희 부부의 셋째 아들이라는 것은 확고한 진실이다.

영범씨는 1999년 12월 28일 지금의 부모님 집에 왔다. 그의 나이 아홉 살 때, 한 살 아래인 친동생과 함께였다.

"넓은 집에 하얀 벽지, 흰색 페인트칠, 노란 전등 불빛이 지금도 생생해요. 저녁밥을 하고 있어 밥 냄새가 많이 났어요. 동생과 내 방을 보여주며 '여기가 너희 방이야'라고 말씀하시는데 편안한 곳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죠. 당시 유리창에 하얗게 김이 서려 있었어요. 그때 창에 서린 김, 밥 냄새를 잊을 수 없어요."

한동안 영범씨 형제는 소풍 온 기분이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새집과 사람들이 좋았다. 그러나 3~4일이 지나도록 낳은 엄마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형제는 생모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며 더 이상 못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았고 풀이 죽었다. 
  
영범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멍한 느낌이 들었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새로운 집에 적응하고 입양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점점 나아졌지만,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가끔 이런 상실감과 그리움이 찾아왔다. 그럴 땐 마치 태엽이 끊긴 장난감처럼 무력감에 빠져들었다. 이런 느낌이 없어진 것은 그가 '비파'라는 악기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정영범씨는 현재 국악앙상블 ‘블랙문’과 비파연주단 ‘비화랑’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영범씨는 중학교 때 방과후 특기적성 수업에서 처음으로 비파라는 악기를 접했다.비파 소리의 매력에 사로잡힌 그는 그길로 집에가서 어머니께 비파를 배우고 싶다고, 연주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때까지 무언가에 특별한 의욕을 보인 적 없는 소극적인 영범씨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 정영범씨는 현재 국악앙상블 ‘블랙문’과 비파연주단 ‘비화랑’의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영범씨는 중학교 때 방과후 특기적성 수업에서 처음으로 비파라는 악기를 접했다.비파 소리의 매력에 사로잡힌 그는 그길로 집에가서 어머니께 비파를 배우고 싶다고, 연주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때까지 무언가에 특별한 의욕을 보인 적 없는 소극적인 영범씨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 정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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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처음 '비파'를 알게 됐어요. 방과 후 특기적성 수업 중에 '비파연주'가 있었어요. 궁금해서 가보았는데 난생처음 들은 비파 소리에 완전히 반해버렸죠. 물풍선들이 오들오들 튕기고 부딪히며 날아가는 것 같은 소리였어요. 그때까지 해외여행을 가본 적은 없지만, 만약 처음으로 낯선 나라에 간다면 바로 이 악기소리와 같은 느낌일 거라고 상상했죠."

그는 그길로 집에 가서 엄마에게 비파를 배우고 싶다고, 연주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어머니는 무언가에 특별한 의욕을 보인 적 없던 소극적인 영범씨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보통 부모들은 자녀가 예체능을 하겠다고 하면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우리 집은 아니었어요. 공부에 대한 강요도 없었고, 하고 싶다고 하면 진심으로 격려하고 도와주셨죠.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고요."

친권 포기하지 않은 생부의 마음 지금은 이해해

영범씨에게는 입양 전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두 개의 시간이 흐르고 있고, 두 개의 인생이 함께 가는 느낌이라고 했다.

"입양 전의 기억은 제겐 마치 친구 같은 존재예요. 힘들 때 더 힘들었던 그 기억을 떠올리면 '이 정도는 이겨낼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입양되기 직전 영범씨의 원가정은 며칠씩 끼니를 굶을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아버지는 형제를 학교에 못 가게 했고 매질도 했다. 계속 결석을 하니 담임이 찾아왔다. 사정을 다 알고 있었던 담임이 '와서 밥이라도 먹고 가라'는 편지를 남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영범씨 생모는 아이들을 집에서 기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자신이 보육원 출신이라 아이들을 보육원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보육원을 통해서 알게 된 한연희씨 부부에게 영범씨 형제를 부탁했다.
  
영범씨는 12월에 입양이 되었기 때문에 이듬해에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지만,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아 한글도 깨치지 못한 채였다. 어머니는 그런 영범씨를 매일 오전 6시에 깨워서 국어책을 읽게 한 다음 학교에 보냈다. 그때 어머니를 '마귀할멈'이라고 써놓은 일기장이 지금도 남아있다며 그는 웃었다.

낳은 부모와 철들 때까지 함께 살았던 영범씨 형제는 입양 부모를 '아줌마, 아저씨'라고 불렀다. 나중에 입양된 여섯째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형들을 따라 '아줌마, 아저씨'를 먼저 하자, 부모님은 비로소 형제들의 호칭을 고치게 했다. 어린 영범씨는 '엄마 아빠'라는 말이 안 나와 30분 동안 탁자 밑에 들어가 연습을 했다.

생부의 친권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영범씨는 가족 소개란에 있는 아버지와 성이 달랐다. 그것을 본 같은 반 친구가 "너희 아빠는 유씨인데 너는 왜 정씨야"라고 물었다. 또 다른 한 친구는 "너 고아 아니야?"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니야, 엄마 아빠 있어"라고 말하며 울었다. 그때 처음 놀린 친구가 축구부였는데 그가 우는 모습을 보고 미안했던지, 다른 아이들에게 "지금부터 영범이 놀리는 애는 가만히 안 둔다"라고 말하고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보호해 줬다.

중학생이 되고부터 그는 스스로를 보호했다. 학기 초 담임선생님이 가정환경조사서를 주면, 인적사항을 다 쓴 뒤 따로 교무실에 찾아갔다. 그렇게 선생님께 입양되었다는 얘기를 먼저 해두었다. 연년생인 동생이 입학한 뒤엔 동생의 학급 담임도 찾아갔다. 누가 놀리면 가만히 있지 않고 싸웠다. 싸움으로 안 되면 든든한 조력자인 두 명의 형에게 도와달라고 하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누가 물으면 입양되었다고 당당히 대답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형제가 많은 이유도 얘기했다. 그 무렵에는 입양에 대한 인식도 많이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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