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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새긴 문신으로 42년 만에 가족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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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12:4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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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흥인동에 사는 윤태훈씨(51)의 왼쪽 팔에는 특이한 문신이 있다. 큰 십자가 아래 점이 네 개 찍혀 있는 모양이다. 경기도 동두천시에 사는 동생 기태씨(49)의 왼쪽 팔에도 똑같은 문신이 있다. 아버지 윤권중씨(2000년 작고)가 새긴 것이다.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윤권중씨는 슬하에 2남1녀를 두고 있었다. 아내와 일찍 헤어진 후 전주시 중화산동 친가에서 부모와 살며 아이들을 키웠다. 

 

기와 찍는 기술자였던 윤씨는 28세 때인 1973년 척추 수술을 받은 후 거동이 불편해졌다. 경제활동을 할 수 없어 자식들을 키울 형편이 안 됐다. 오랜 고심 끝에 아이 셋을 보육원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윤씨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질 상황에 놓이자 각자의 몸에 가족만이 알 수 있는 표식을 새겼다. 훗날 떨어져 살더라도 이 표식으로 형제들을 찾으라는 의미였다. 윤씨는 큰아들 태훈(8), 둘째 아들 기태(6), 막내딸 현경(2)의 왼쪽 팔에 똑같은 문신을 새겼다. 

 

해외입양인 윤현경씨 입양 전 사진 ⓒ윤형경·윤태훈씨 제공

해외입양인 윤현경씨 입양 전 사진 ⓒ윤형경·윤태훈씨 제공

 

  

3남매 보육원 보낼 때 ‘가족 표식’ 새긴 아버지

 

기독교 신자였던 윤씨는 십자가를 크게 새기고 그 아래 가족의 숫자(아버지, 아들 둘, 딸)만큼 점 4개를 찍었다. 장남 태훈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한다. “아버지가 우물가에서 나와 동생 둘의 팔에 문신을 새겼다. 보육원에 보내기 전 마음먹고 새긴 것이다.”

 

1975년 3월 윤씨는 전주보육원을 찾아 아이 셋을 맡겼다. 그는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잘돼서 너희들을 꼭 찾으러 오겠다”며 눈물을 머금었다. 딸 현경은 당시 2살이었다. 아버지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현경이는 너무 어려 보육원에서 키울 수 없게 됐고, 해외 입양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리고 1976년 1월7일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의 한 가정으로 입양됐다. 그렇게 현경이는 가족들과 떨어져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태훈씨와 동생 기태씨는 전주보육원에서 6년 동안 생활했다. 전주에 살고 있는 작은아버지 윤치경씨(60)는 “조카들이 보육원에 들어간 뒤에도 어머니가 자주 들러 손주들을 챙겼다”고 말했다. 1981년 형제는 전주보육원을 나와 조부모·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다. 태훈씨는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할머니가 데리러 왔다”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도 가정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1982년쯤 아버지 윤씨는 아들 둘을 데리고 전주를 떠나 경기도 동두천시에 정착했다. 그곳에서도 기와 찍는 일을 했다. 그는 해외로 입양 보낸 막내딸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 아들 형제에게 “너희들이 잘돼서 언젠가는 현경이를 꼭 찾아라”라고 신신당부했다. 

 

2000년 윤씨는 65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태훈씨는 “아버지의 시신은 화장해서 동두천에 모셨다. 이곳에는 할머니의 산소가 있다”고 말했다. 그 뒤 태훈씨와 동생은 각자 결혼해 따로 살고 있다. 동생 기태씨는 동두천에, 형 태훈씨는 서울에 터전을 잡았다. 

 

태훈씨 형제는 어머니를 입에 올리는 것을 꺼린다.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헤어졌고, “우리를 버렸다”는 생각으로 원망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의 교류도 없었다. 지금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행방불명’ 상태라고 한다. 

 

아버지가 왼쪽 팔에 새긴 문신이 형제에게는 큰 상처가 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문신은 ‘흉측하고 불량스러움’의 상징처럼 여겼다. 이로 인해 형제는 다른 사람에게 놀림감이 되기도 했고, 폭행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태훈씨 형제는 미국으로 입양 간 동생을 잊은 적이 없다. “잘돼서 꼭 찾아라”라는 아버지의 유지를 항상 가슴속에 담고 살았다. 하지만 사는 게 팍팍하고 형편이 어렵다 보니 동생을 찾겠다는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윤태훈씨의 가족사진(아래 맨 왼쪽 동생 윤기태씨, 두 번째 줄 맨 오른쪽 아버지 고 윤권중씨, 가운데 윤태훈씨) ⓒ윤형경·윤태훈씨 제공​

윤태훈씨의 가족사진(아래 맨 왼쪽 동생 윤기태씨, 두 번째 줄 맨 오른쪽 아버지 고 윤권중씨, 가운데 윤태훈씨) ⓒ윤형경·윤태훈씨 제공​

 

“내 친구 팔 문신과 똑같다” 제보

 

시민단체인 ‘SNS시민동맹’과 미혼모 단체인 ‘미혼모협회 I’m MOM’, 실종전문단체인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시민의모임(전미찾모)은 지난해부터 공동기획으로 ‘해외입양인 가족 찾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페이스북에는 ‘실종자 해외입양인 찾기’ 페이지와 ‘사이트’(www.siljong.org)도 개설했다. 해외입양인들이 가족을 찾는다고 도움을 요청하거나, 중앙입양원 등에 가족을 찾는다는 글을 올리면 전단지와 기사 형식으로 만들어 SNS에 공유하고 있다.

 

지난 5월23일 49번째 순서로 미국 입양인 Y씨(여)가 가족을 찾는 사연을 알렸다. 그는 지난 3월5일 중앙입양원 홈페이지 ‘친가족찾기’에 자신의 인적사항과 사진을 등록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Y씨는 자신의 생년월일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부모나 형제들에 대한 기억은 아예 없었다. 보육원에서 촬영했던 사진과 왼팔에 새겨진 문신이 유일한 표식이었다. 공동 프로젝트팀은 전단을 만들 때 어릴 적 사진 옆에 문신을 크게 넣었다. 

 

Y씨가 전북 출신이기 때문에 전북 지역 SNS에 집중 공유했다. 그랬더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Y씨의 오빠가 자신의 친구라는 제보자가 나타난 것이다. 친구의 왼팔에도 똑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그는 SNS시민동맹 회원이자 전북 지역 페이스북 그룹(우리 익산 잘 나가게)에서도 활동 중인 김승현씨(50)였다. 김씨가 말한 친구가 바로 ‘윤태훈씨’였던 것이다. 

 

김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전단지 사진을 보고 친구 동생이란 것을 단번에 알아봤다”고 했다. 그는 “태훈이와 이웃집에서 살았다. 중학교 다닐 때 팔에 있는 문신이 하도 특이해 이게 뭐냐고 물어봤더니 가슴 아픈 사연을 얘기해 줬다”며 “그때 어린 마음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친구 동생을 찾아주겠다고 마음을 먹고 해외입양인들이 가족 찾는 것이 있으면 유심히 봤다”고 말했다. 

 

김씨는 친구 태훈씨에게도 이런 사실을 알려줬다. 그는 “태훈아, 미국으로 입양 간 현경이 찾았다”고 전했다. 태훈씨는 깜짝 놀랐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승현씨가 링크해 준 동생 관련 사진과 내용을 보고 “내 동생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때서야 동생이 가족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태훈씨는 아버지가 생각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결국 43년 전 아버지가 “형제들을 찾을 때 표식으로 사용하라”고 한 그 문신 덕분에 동생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윤현경씨 왼쪽 팔에 있는 문신(왼쪽 사진)과 오빠의 왼쪽 팔에 있는 문신 ⓒ윤형경·윤태훈씨 제공​​

윤현경씨 왼쪽 팔에 있는 문신(왼쪽 사진)과 오빠의 왼쪽 팔에 있는 문신 ⓒ윤형경·윤태훈씨 제공​​

 

 

변호사 출신 기업가로 성공

 

기자는 미국에 있는 윤현경씨와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 따져봤다. 가장 정확한 유전자 검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여러 근거와 정황이 거의 일치한다. 3남매의 왼쪽 팔에 새겨진 독특한 문신은 ‘가족관계’를 증명하는 보증수표라고 볼 수 있다. 또 태어난 지역, 입양 당시 상황, 나이, 이름 등이 정확히 일치한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도 의심의 여지 없이 믿고 있다. 

 

태훈씨는 “동생을 이렇게 찾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며 “그동안 동생에 대한 걱정도 많았다. ‘나쁜 가정에 입양됐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좋은 양부모 만나 훌륭한 모습으로 성장해서 너무 고맙고 기쁘다”고 말했다. 

 

작은아버지 윤치경씨도 “힘들게 살 줄 알았더니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고맙다. 부모가 버린 것이 아니라 당시의 가정형편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입양을 보내게 된 것”이라며 “고모 두 분이 아직 생존해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동생과 조카와의 상봉에 기대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미국으로 입양 간 윤현경씨(45)는 어떻게 살았을까. 미국 이름은 ‘사라 존스’다. 두 명의 입양된 자매와 함께 자랐다. 현경씨는 대학에서 엔지니어링과 법을 전공했다. 10년 이상 변호사로 활동했고, 현재는 테크놀로지 관련 기업가로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인과 결혼해 아들 형제를 낳았고, 현재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살고 있다. 

 

그는 결혼해 아이를 키우다 보니 친부모를 찾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를 위해 지난 3월 중앙입양원 홈페이지에 ‘가족찾기’ 등록을 했고, 5월초에는 전주시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결국 SNS를 통해 불과 몇 시간 만에 헤어졌던 가족을 찾게 됐다. 중앙입양원 관계자는 “유전자 검사를 거쳐 가족관계가 맞는지 최종 확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 “내 동생이 100% 확실하다” - 윤현경씨 오빠 윤태훈씨

 

윤현경씨가 동생이라고 확신하는가.

 

“100% 확실하다. 문신은 우리 형제들밖에 없는 표식이다. 어렸을 때 내가 끌어안고 있었던 기억이 있어서 사진을 보는 순간 동생이라고 확신했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마음속으로 많이 걱정됐고, 어떻게 지내는지도 궁금했다. 죽는 순간까지 못 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먼저 찾아줘서 너무 고맙고 많이 보고 싶었다.”

 

아버지가 팔에 새긴 문신으로 가족을 찾았다.

 

“사실 살아오면서 이것 때문에 나도 동생도 상처를 많이 받았다. 현경이는 여자인데, 나처럼 상처를 받지나 않는지 걱정됐다. 동생들에게 죄짓는 기분이었고,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원망도 많이 했다.” 

 

지하에 계신 아버지가 좋아하실 것 같다.

 

“너무너무 대견스럽게 생각하실 것이다.” 

 

동생을 찾았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알렸나.

 

“다들 알고 있다. 너무 훌륭하게 커 줘서 고맙게 생각한다.” 

 

동생 가족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보고 싶다. 사진으로 보니 신랑도 듬직하게 생겼고, 아들 둘도 잘생겼다. 사진으로만 봐도 동생 가족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었다.”

 

동생이 한국에 오면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은.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곳이다. 우리들의 고향이자 작은아버지가 사시는 전주도 가고 싶다. 부산에 사는 작은 고모가 현경이 어렸을 때 잠시 키웠는데, 무척 보고 싶어 하신다. 함께 가고 싶은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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