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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軍 물자 풀어 한국 이재민 지원한 ‘전쟁고아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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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6 16:35:54
최근 대구 육군 군수지원사령부에 기념실 개관 
부인은 남편 유언 따라 북녘 미군 유해 찾는 데 30년 헌신
 
2011년 4월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남편 사진을 들고 있는 생전의 한묘숙 여사. [김형우 기자]

2011년 4월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남편 사진을 들고 있는 생전의 한묘숙 여사. [김형우 기자]

지난해 12월 29일 대구 육군 제5군수지원사령부에서는 작지만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리처드 위트컴(1894~1982) 장군을 기리고자 ‘위트컴 장군실’을 개관한 것. ‘위트컴 장군실’은 제1·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때 군수 전문가로 활약한 위트컴의 업적은 물론,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그의 일대기가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전시돼 있다. 개관식에는 자녀인 민태정 위트컴 희망재단 이사장과 최병호 부산대 교육부총장, 알란 디블릭 미8군 부사령관, 강석환 위트컴 희망재단 이사 등이 참석해 고인을 기렸다. ‘위트컴 장군실’ 건립과 개관식을 주관한 박주홍 제5군수지원사령관의 설명은 자못 비장하다. 

“위트컴 장군이 보여준 군수 분야의 전문성과 폐허가 된 대한민국 재건을 위해 헌신한 그의 발자취는 우리에게 큰 감동과 가르침을 주고 있다. ‘위트컴 장군실’은 우리 부대가 지향하는 정신적 지표이자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한미 우정의 장소가 될 것이다.” 

그의 말처럼 북한의 연이은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동맹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오늘날, 위트컴 장군이 주는 교훈은 크다. 앞서 2014년 개관한 부산 남구 유엔평화기념관에 위트컴 장군 상설전시관이 마련된 데 이어, 제5군수지원사령부에 그를 기리는 ‘위트컴 장군실’이 만들어진 것은 그의 생애가 참군인으로서, 인류애를 실현한 휴머니스트로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美軍 물자 풀어 한국 이재민 지원한 ‘전쟁고아의 아버지’
 
 
“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 
-1953년 美 의회 청문회장에서 위트컴 장군이 한 발언

 
 
 

백전노장 참군수인

1894년 미국 캔자스에서 태어난 위트컴 장군은 1916년 ROTC로 군생활을 시작해 제1·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등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다. 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 가장 치열하던 ‘오마하 해안 전투’에서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45년에는 일본이 점령 중이던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한 상륙작전에서 17만여 명의 대규모 병력과 군수물자를 섬 요충지로 적확히 수송해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냉전 시절 미 공군이 주둔하며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서유럽과 미국 본토를 보호한 아이슬란드 케플라비크 기지도 그의 손을 거쳤다. 1941년 위트컴 장군이 기지를 건설할 때는 독일 해군의 이동을 감시하는 전초기지였다. 50~51년에는 영하 60도인 그린란드에 공군기지를 건설하고자 세계 각국의 병력과 장비,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했는데, 당시 투입된 인력과 장비는 파나마 운하 건설 때와 비슷하다 하니 군수전문가로서 그의 면모를 알 수 있다. 

이처럼 군사작전에 필요한 병력과 군수물자를 충원하고, 보급 지원을 하는 병참(兵站)은 전쟁 성패와 직결된다. 한(漢)나라 유방이 항우와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전투를 승리로 이끈 ‘한신’보다 후방 보급을 맡은 ‘소하’의 공을 으뜸으로 친 것도 군수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위트컴 장군 역시 유방의 소하처럼 부임지마다 그 소임을 철저히 완수해 승리의 발판을 만들었다. 

‘군수 영웅’ 위트컴 장군은 6·25전쟁 막바지인 1953년 미 제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제2군수사령부는 개전 초기 막대한 손실을 입은 한국군을 위해 탄약 70만 발, 소화기 50만 정, 화포 1500여 문, 차량 2만여 대 등 200만t 규모의 장비와 군수물자를 최전방으로 실어 날랐고, 후방지역 치안 유지는 물론 전쟁포로와 피란민의 관리 임무도 수행했다. 유엔군의 군수물자 확보와 적확한 수송, 국군 전력 증강은 그의 몫이었다. 개전 초기 9만6112명이던 한국군 병력이 53년 7월 정전협정 당시 56만8994명의 대군이 된 것도 한국군 전력 증강에 매진한 위트컴 장군의 공이 컸다.
 

병원 · 대학 설립, 再建 위한 노력

정전협정이 맺어진 1953년 11월 부산에 큰 재앙이 닥쳤다. 피란민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이 부산역까지 번진 이른바 ‘부산 역전 대화재’로 6000여 가구가 피해를 입었고, 29명의 인명 피해와 3만여 명의 이재민이 생긴 것이다. 현재 가치로 따지면 1조8000억 원에 이르는 대규모 화재 피해가 발생한 것. 아비규환의 화재 현장으로 달려간 위트컴 장군은 망설임 없이 미군 군수물자를 풀어 이재민을 위한 천막을 지었고, 옷과 식료품을 나눠줬다. 부산시민과 피란민은 ‘푸른 눈의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천막에서 그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위트컴 장군은 이 일로 본국으로 소환을 당한다. 미군이 써야 할 군수물자를 한국 이재민에게 나눠줘 ‘군법’을 어겼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미국 의회 청문회장에 선 그는 ‘군법 위반’을 추궁받는 자리에서 당당하게 소신을 밝혔다.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 

위트컴 장군을 추궁하던 의원들도 기립박수로 그의 인류애와 확고한 한미동맹 철학에 경의를 표했다. 이 일이 있은 뒤 위트컴 장군은 더 많은 구호물자를 싣고 한국으로 돌아와 이재민을 위한 200가구 규모의 주택을 지었다. 부산시민들은 그를 기리는 마음을 담아 공덕비를 세웠다.  

2011년부터 기자는 위트컴 장군의 부인 한묘숙(1927~2017) 여사를 서울 한남동 자택과 용산 미8군 기지 등에서 여러 차례 만나 위트컴 장군에 대해 취재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만남에서 30여 년 전 떠난 남편을 여전히 ‘장군님’이라고 부르며 그리워했다. 당시 취재수첩과 한 여사를 인터뷰한 2011년 5월호 ‘신동아’ 기사를 보면 위트컴 장군의 청렴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여럿 나온다.  

“장군님은 평소 누군가 군용 종이에 메모라도 하면 ‘정부 자산을 왜 함부로 쓰느냐’고 다그칠 정도로 공사(公私)를 분명히 했어요. 장군님 상사가 나를 군용차에 태우려 해도 같은 말을 하며 사양했고, 잠들기 전에는 반드시 자신의 손수건과 옷을 직접 빨아 빨랫줄에 널었어요.”
 

도포자락 휘날리며 병원 건립비 모금

지난해 12월 29일 대구 제5군수지원사령부에 문을 연 ‘위트컴 장군실’.  [사진 제공 · 제5군수지원사령부]

지난해 12월 29일 대구 제5군수지원사령부에 문을 연 ‘위트컴 장군실’. [사진 제공 · 제5군수지원사령부]

위트컴 장군은 이후 미군 대한원조처(AFAK)를 통해 전후 복구와 부산시민을 돕는 일에 큰 힘을 보탰다. 그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의료와 교육이었다. 피란민촌을 자주 찾던 위트컴 장군은 어느 날 보리밭에서 아기를 낳는 산모를 목격하고는 의료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전쟁고아와 피란민의 치료를 위한 병원도 절대 부족하던 시절이다. 그는 병원 건립을 위해 미군 부대원들을 대상으로 월급 1% 기부 캠페인을 벌였으며, 메리놀수녀회 수녀들과 한복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모금 활동도 펼쳤다. 도포자락 휘날리며 곰방대를 문 미국인 장군의 행차를 보려고 시민이 몰려들었고, 이때 모금한 기금으로 부산 메리놀병원 등 여러 병원을 세울 수 있었다(‘메리놀병원 50년사’).  

또한 협소한 목조건물이던 부산대를 신·증축하고자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테일러 미8군 사령관을 설득해 오늘날 부산대가 있는 장전동 일대 50만 평(약 165만2892㎡)을 제공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부산대 장전캠퍼스를 지을 때는 25만 달러 상당의 건축자재를 지원했고, 휘하 공병부대로 하여금 진입로와 대지 조성 공사를 돕게 했다(‘부산대 60년사’). 

이러한 열정과 헌신은 최근 기념관을 건립하고자 자료를 수집하던 중 박주홍 사령관이 발견한 문서(편지와 공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당시 부산 역전 대화재와 전후 복구 사업을 위해 시멘트, 못, 철강, 전기선 등 건설자재가 필요했지만 한국에선 이러한 자재를 구할 수 없었다. 이에 낙담한 부산의 한 기업(대양석탄산업회사) 대표가 위트컴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위트컴 장군은 테일러 사령관에게 ‘한국 회사가 공사를 해야 하는데 자재가 부족하니 도와달라’는 요청과 함께 필요한 자재 목록까지 보낸 사실이 문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 사령관은 “위트컴 장군은 당시 한국 기업의 어려움을 정성을 다해 본국에 알렸고, 이는 전후 복구와 우리 기업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며 “테일러 미8군 사령관도 위트컴 장군에게 ‘귀하가 요청한 한국 재건에 필요한 자재와 장비가 곧 부산에 도착한다’는 문서를 보냈는데, 이를 통해 그가 헌신적으로 전후 복구에 임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54년 퇴역한 위트컴 장군은 한국에 남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을 맡아 한미 외교라인의 가교 구실을 했고, 미8군 사령관(1951년 4월~1953년 1월) 겸 유엔군 사령관이던 ‘한국 육군의 아버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과 함께 한미재단을 설립해 한국 재건과 부흥 원조에 나섰다. 그리고 보육원과 고아원을 짓고 전쟁고아를 돌봤다. 그의 졸기(卒記)를 실은 ‘부산일보’ 1982년 7월 23일자 기사 제목도 ‘한국 전쟁고아의 아버지, 부산 UN 묘지에…’였다. 

부산 시민들도 그를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기억한다. 부인 한묘숙 여사를 만난 것도 전쟁고아들에게 선물을 나눠준 게 계기가 됐다. 한 여사는 충남 천안에서 우리나라 최초 아동보육시설인 ‘익선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963년 어느 날 위트컴 장군이 익선원을 찾아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줬다. 생전에 한 여사는 위트컴 장군과 결혼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장군님은 선물을 한아름 들고 여러 고아원을 자주 찾았어요. 전쟁고아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희망을 주는 연설을 하고는 공책과 연필을 선물하는 걸 큰 기쁨으로 여겼죠. 익선원 아이들도 장군님 오시는 날만 기다렸어요. 1964년 어느 날에는 장군님이 양장을 하고 오라는 거예요. 평소 한복을 입었는데, ‘무슨 일일까’ 하고 궁금했죠. 얼른 양장을 하고 미국대사관을 갔는데, 아 그날 결혼식을 올린 겁니다. 생각하면 우스워요.” 

한 여사는 위트컴 장군과 결혼이 재혼이었다. 전남편과 이혼한 후 미국 유학을 떠나려 했지만 당시 유학 정보가 없어 고민하던 중 익선원을 찾은 위트컴 장군에게 ‘유학 도움’을 요청한 게 부부의 연이 됐다고 했다.
 

마지막 유언, 미군 유해 송환

[동아일보]

[동아일보] 

1954년 부산대 효원교사 준공식에서 위트컴 장군이 첫 삽을 뜨고 있다(위). 전후 복구를 위해 위트컴 장군이 요청한 공사 자재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 [사진 제공 · 제5군수지원사령부]

1954년 부산대 효원교사 준공식에서 위트컴 장군이 첫 삽을 뜨고 있다(위). 전후 복구를 위해 위트컴 장군이 요청한 공사 자재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 [사진 제공 · 제5군수지원사령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위트컴 장군은 1982년 심장마비로 타계하기 전까지 은밀하게 북녘에 있는 미군 유해 송환에 나섰다. 6·25전쟁 중 ‘장진호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 유해를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는 걸 마지막 임무로 여겼다.  

장진호는 1950년 영하 40도의 겨울 혹한에 미 해병대 1사단 1만여 명과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 명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함경남도 개마고원 일대의 장진호에서 미 해병대 절반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남하는 2주간 지연됐고, 피란민 등 20여만 명이 그 유명한 ‘흥남철수’를 할 수 있었다. 생전에 위트컴 장군은 한 여사에게 “장진호에 수천 구의 미군 유해가 있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부창부수(夫唱婦隨)였다. 한 여사도 임종 직전까지 장군의 유지에 따라 미군 유해 송환에 헌신했다. 

한 여사는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 고문 신분으로 사이공에 간 위트컴 장군을 따라 그곳에서 몇 해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위트컴 장군은 한 여사에게 “홍콩에 한 번 다녀오라”고 했다. 홍콩에서 중국으로 갈 방편을 마련해보라는 말도 남겼다. 그 이유는 한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한 여사가 홍콩을 드나들던 1979년, 홍콩 사업가의 초청으로 중국 본토에 입국할 기회가 생겼다. 그때 위트컴 장군은 아내에게 “6·25전쟁 때 죽은 미군 병사의 유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며 구체적인 ‘지령’을 내렸다. 한 여사의 생전 인터뷰는 이렇다. 

“장군님이 왜 중국 비자를 발급받으려고 그토록 애썼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제가 중국으로 갈 때면 장군님은 지도 한 장과 만날 사람의 리스트, 미국대사관 위치를 알려줬어요. 장군님은 주프랑스 미국대사관에서 무관으로 일한 적이 있어 그때 사귄 중국 고위층을 잘 알았어요. 베이징 서우두(首都)국제공항에 내리면 마중 나온 사람이 ‘홍치’(紅旗·중국 자동차 상표)를 끌고 와 나를 에스코트했는데, 장군님이 다 연락을 해놓았는지 그대로 따라가면 됐어요. 중국이나 북한에서는 유해 얘기는 꺼내지 않았어요. 장군님도 일절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뼈다귀’ 찾으러 왔다면 아마 미쳤다고 했을 거예요.” 수십 차례 한국과 중국을 오가다 그는 아예 중국에 눌러앉았다. 주로 베이징호텔과 젠궈(建國)호텔에 투숙했는데, 젠궈호텔 810호에서는 8년간 거주했다. 1982년 위트컴 장군이 서울의 주한미군 전용호텔이던 내자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도 한 여사는 중국에 있었다. 2011년 4월 기자가 “30년이 넘었는데 왜 지금까지 미군 유해 발굴을 계속하느냐”고 묻자 한 여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장군님이 돌아가실 때도 ‘북한에 묻힌 유해를 제발 미국으로 보내달라’는 말씀을 남겼대요. 그래서 이 일을 그만둘 수 없었어요. 미혼이던 그가 구태여 나와 결혼한 건 자신이 죽어도 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北·中에서 30년, 대하소설 같은 삶

[사진 제공 · 11TH POST]

[사진 제공 · 11TH POST] 

1954년 10월 16일 위트컴 장군과 고아원 원생들. 위트컴 장군의 수많은 고아원 건립과 지원에 대해 원생들이 감사 공연을 한 뒤 기념촬영을 했다(위). 한묘숙 여사의 미군 유해 발굴 소식을 처음 보도한  ‘신동아’ 2011년 5월호. 한묘숙 여사가 가지고 있는 북한 입국 비자. [김형우 기자]

1954년 10월 16일 위트컴 장군과 고아원 원생들. 위트컴 장군의 수많은 고아원 건립과 지원에 대해 원생들이 감사 공연을 한 뒤 기념촬영을 했다(위). 한묘숙 여사의 미군 유해 발굴 소식을 처음 보도한 ‘신동아’ 2011년 5월호. 한묘숙 여사가 가지고 있는 북한 입국 비자. [김형우 기자]

중국에 오래 있다 보니 그를 찾는 한국 사람도 많이 생겼다. 1980년대 후반 한 여사는 주중 한국대사관과 ‘비슷한’ 역할을 했는데, 김영삼(YS)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방중(訪中) 요청 친서를 직접 공산당 간부에게 전달했고, 대기업 인사들과 중국 고위층을 연결해주기도 했다. 한 여사가 묵는 호텔에는 이처럼 중국이나 북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과 중국 고위층,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자주 찾았다. 이즈음 한 여사는 허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위원장과 연이 닿았다.  

1990년 6월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도 허담의 초청장이 있어 가능했다. 중국에 들어간 지 11년 만이었다. 1990년대 초 북한을 드나들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북한은 어디를 가든 지도원과 운전수, 참사가 따라붙었는데 선물과 칭찬으로 먼저 호감을 산 뒤 친해지면 북한 외국인묘지와 장진호에 대해 물어보는 식으로 정보를 수집했다. 한 여사는 99년까지 스물다섯 번 방북했지만, 방북 초청장은 수도 없이 받았다고 했다. 북한에 들어갈 때는 선물로 옷이나 의약품, 일본약 구심(求心·심장약)을 몇 상자씩 준비했는데, 이를 위해 서울 집을 팔고 물려받은 재산을 썼다. 위트컴 장군의 연금도 대부분 미군 유해 정보수집에 쏟아부었다.  

한 여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북한은 창고를 만들어 유해를 쌓아두고 있는데, 유해가 누구 건지 모른다. 미군 유해를 미국과 협상카드로 생각하니 유해만 모아 쌓아놓은 거다. 나는 유해 발굴에 ‘협조하는’ 역할을 했고, 유해가 발견되면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사무국’(DPMO·2015년 국방부 직할청 DPAA로 격상)이 사망·실종자 명단과 맞춰본 뒤 친인척 유전자 감식을 통해 진위를 밝힌다”고 말한 바 있다. 공식적인 미군 유해 송환은 1954년 유엔 측이 북한으로부터 유해 4011구(국군 유해 2144구, 나머지는 유엔 참전군 유해)를 돌려받은 이후 잠정 중단됐다. 90년대 초 북한은 ‘미군 유해’를 발굴했다며 보상금을 요구했는데, 96년부터는 북한에 인력과 장비를 보내 본격적으로 유해 발굴 작업을 벌여 220여 구의 미군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2005년 북핵 문제로 북·미 관계가 악화되자 안전 문제 때문에 작업은 중단됐다. 그리고 30년 넘게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미군 유해를 찾아 떠돈 아내는 2017년 1월 1일 그리운 남편 곁으로 떠났다. 1월 4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의 리처드 장군 묘역에 안장된 것. 유럽 전선과 한반도 전장을 넘나들며 전쟁 승리의 발판을 만들고 마지막까지 인류애를 실천한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남편, 남편 유지를 따라 30여 년을 떠돈 아내의 일생은 한 편의 대하(大河)소설 같다. 

한편 대구 제5군수지원사령부 개관식을 도운 강석환 위트컴 희망재단 이사는 “2011년 ‘신동아’ 최초 보도 이후 위트컴 장군과 한묘숙 여사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부부를 기리는 추모식과 기념관 건립 등이 계속되고 있다”며 “인도주의와 한미동맹의 표상인 위트컴-한묘숙 부부의 생애가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인터뷰 | ‘위트컴 장군실’ 마련, 박주홍 제5군수지원사령관 
“군수부대 ‘롤모델’이자 살아 있는 한미동맹”
[사진 제공 · 제5군수지원사령부]

[사진 제공 · 제5군수지원사령부] 

박주홍(55 · 사진) 제5군수지원사령관은 1월 9, 10일 ‘주간동아’와 전화 인터뷰에서 “위트컴 장군은 군수부대의 표상이자 ‘롤모델’이며 한미동맹의 상징”이라면서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을 전승으로 이끌고 헌신적인 삶으로 폐허가 된 한국을 위해 온전히 희생한 참군인”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그와 일문일답. 

‘위트컴 장군실’을 개관한 이유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참군인이자 인도주의자면서 군인으로서 인격도 갖춘 분이기 때문이다. ‘신동아’ 기사(2011년 5월호)에 나온 것처럼 사적으로 군용 종이 한 장을 못 쓰게 하는 청렴한 군인이었고, 정치적 중립에 대한 철학도 명확했다. (딸인) 민태정 위트컴 희망재단 이사장에게 들어보니, 매일 딸에게 편지를 쓰는 자상한 가장이기도 했다. 딱딱한 군 조직에서 근무하지만 가족애와 청렴함, 애국심을 모두 갖춘 군인이었다. 이런 분이 한국 여성과 결혼해 전쟁고아를 돕는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현대전에서 전투력은 정신력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장병들의 정신력 강화를 위해 군수부대의 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롤모델’을 찾았고, 위트컴 장군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롤모델을 통해 군수부대원의 정신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본다. 한편으로는 미군에게도 한미동맹이 무엇인지 교육시키고 싶었다.” 

한미동맹을 교육시킨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위트컴 장군의 생애를 알게 되면서 한미동맹 정신이 살아 있다고 느꼈다. 맥아더 장군, 밴 플리트 장군, 리지웨이 장군 등 훌륭한 분이 많지만 위트컴 장군처럼 한미동맹의 상징적 인물은 없었다. 자신의 삶을 동맹국에서 온전히 희생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미군도 가끔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미군을 상대로 위트컴 장군의 이야기를 하며 ‘동맹은 한번 싸워서 도와주는 게 아니다. 위트컴 장군처럼 평생 같이 가는 거다. 전쟁이 끝나도 그 나라를 위해 온전하게 희생하고 죽어도 그 나라에 묻히는 게 동맹’이라고 말했더니 무척 놀라며 감동하더라. 개관식에 참여한 디블릭 미8군 부사령관도 ‘위트컴 장군실’을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교육시키는 부대원 교육 장소로 활용하겠다고 했다.”
 
‘한국민 도와야 한다’ 위트컴 문서 발견
 
6·25전쟁 당시 미 2군수사령부의 임무는 무엇이었나.  

“그렇지 않아도 그것과 관련해 미군 자료를 요청했는데 자료가 많이 없어 국내외 논문을 찾아봤다. 당시 미 제2군수사령부는 부산에 있으면서 한반도 전체 군수지원에 관한 총체적 책임을 졌고, 한국군 육성을 지원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다.” 

기념실 자료 수집은 어떻게 했나.  

“위트컴 희망재단과 부산대, 유엔평화기념관 등을 통해 장군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했고, 미군의 협조를 받아 그의 군 복무 관련 기록을 확인했다. 무공훈장을 받은 프랑스대사관과 국가기록원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료를 수집했다.”  

자료 수집을 하면서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나.  

“위트컴 장군은 테일러 당시 미8군 사령관과 지속적으로 공문 및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한국 재건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미국의 원조기금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집요하게 묻거나 요청했다. 한국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성심을 다해 도움을 줬다. 그러한 노력과 고심으로 부산대를 세웠고, 병원과 도로를 건설하는 등 다양한 재건 활동도 펼쳤다. 당시 장군은 한국군도 지휘했는데, 한미 공병부대와 한국 기업체가 참여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한국 기업은 성장의 기회를 얻었고…. 한국 경제도 키우면서 가장 효과적인 재건 활동을 펼친 것이다.”



 

입력 2018-01-16 13:33:55

  •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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